2025-09-09

목차

농업사회의 감속 원리와 문명의 한계

맬서스의 함정에서 드러난 인구와 식량의 절망적 격차

농업 혁명 이후 인류가 맞닥뜨린 첫 번째 딜레마는 너무나 단순하면서도 잔혹했다. 한 사람이 둘을 낳고, 둘이 넷을 낳는 기하급수적 인구 증가. 반면 농업 생산은 좋은 땅부터 시작해서 점점 나쁜 땅으로 확장되며 체감하는 현실. 이것이 바로 맬서스가 간파한 인류 문명의 근본적 한계였다.

농사는 반드시 제일 좋은 땅에서 시작한다. 생산량을 늘리려면 조금씩 더 나쁜 땅으로 영역을 확장해야 한다. 같은 노동력을 투입해도 수확은 줄어든다. 노동 시간은 계속 늘어나는데 생산성은 떨어진다. 이것이 바로 농업 생산의 체감 법칙이다. 맬서스는 이를 통해 식량 생산은 산술급수적으로 늘어나는데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서 항상 인구가 너무 많아 한계에 부딪혀 정말 헐벗고 굶주린 한계 상태에서 살아간다고 분석했다.

더욱 비극적인 것은 개인의 선택이었다. 농민들은 가족을 먹여 살릴 만큼만 일하고 싶어했다. 더 생산하려면 더 힘이 들기 때문이다. 내가 왜 굳이 더 고생해야 하나? 먹고살 만큼이면 충분하지 않나? 그런데 국가는 세금이 필요했다. 국가를 유지하려면 잉여 생산물이 있어야 했다. 결국 농민들에게 “야, 너 세금 내야 돼. 세금 안 내면 아주 곤장도 때리고 가두고 혼내 줄 거야”라며 강제로 더 많은 노동을 하도록 만들었다.

강압과 착취로 유지되는 농업 문명의 구조적 모순

문명이란 물질적, 정신적으로 발전하는 것이어야 한다. 경제적으로 더 나아지고 사회적으로 더 좋은 사회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농업 사회는 정반대였다. 경제적으로는 더 나빠지고 사회적으로는 속박과 강압이 심화되는 퇴행적 사회였다. 농업 사회에서는 구조적으로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가 적대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 모순을 가장 날카롭게 지적한 사람이 바로 유발 하라리였다. 그는 『사피엔스』에서 **“농업 혁명은 역사상 최대 사기극이다”**라고 단언했다. 농업 혁명이 인류에게 가져다준 것은 풍요가 아니라 착취였고, 자유가 아니라 속박이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을 얼마나 착취했는지 그 때문에 사기극이라고 표현했을 정도였다.

원시 수렵 채집 사회 사람들이 농업 사회 사람들보다 더 건강했고 키도 컸다. 왜일까? 계속 이동해야 하는 수렵 사회에서는 아이가 많이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이동해야 되니까 애를 덜 낳게 되는 거다. 그러니까 아예 수태가 잘 안 된다. 정주하는 농업 사회에서는 유아 사망률이 상대적으로 낮아져 인구가 급증했다. 그 결과 1인당 자원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농업 사회의 잔재가 오늘날에도 우리의 발전을 방해하고 있다. “열심히 일하라”, “과소비하지 마라”, “라떼는 말이야” 같은 농업 사회적 사고방식이 여전히 우리가 정말 지식 산업 혁명, 4차 산업 혁명을 통해서 선진국이 못 되도록 제어하고 있다.

로마 카토와 여불위가 깨달은 가속 성장의 비밀

그런데 농업 사회에서도 이 한계를 꿰뚫어본 현자들이 있었다. 로마의 카토와 중국의 여불위가 바로 그들이었다. 이들은 가속과 감속의 원리를 완전히 파악한 사람들이었다. 로마의 카토는 한니발을 무너뜨린 스키피오 가문과 어깨를 겨루는 쌍벽을 이루는 명문 출신이었다.

사람들이 카토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정말 잘 살 수 있습니까?” 카토의 대답은 명확했다. “목축을 하세요.” 왜 목축일까?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것처럼 목축 동물의 개체 수도 훨씬 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기 때문이었다. 사람은 아이를 많이 안 낳지만 동물은 아이를 새끼를 많이 낳는다. 그래서 “적당히 살려면 목축을 적당히 하고, 가난하게 살고 싶으면 목축을 엉터리로 하라”고 했다.

동양에서는 여불위가 같은 통찰을 보여주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물었다. “평생 농사를 지으면 얼마나 벌 수 있습니까?” “열 배 정도.” “평생 장사를 하면?” “백 배는 볼 수 있어.” 여불위의 아버지도 농업 생산이 체감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미 농업이 체감하는 농사를 평생 지어봐도 열 배 이상 못 본다는 걸 알고 장사면 백 배 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질문. “나라를 세우면 얼마나 봅니까?” “가늠할 수 없다.” 이 ‘가늠할 수 없다’는 말에는 다 뺏을 수도 있고 다 날릴 수도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여불위는 모든 재산을 투입해서 훗날 진시황이 될 인질을 후원했다.

심경밀식의 참혹한 실패가 증명한 농업 한계의 극명함

농업 사회에서 생산성을 높이려는 시도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가 바로 모택동의 심경밀식이다. 이는 농업 생산의 체감 한계를 벗어나려는 비과학적 시도였다. 논을 보니 벼 사이사이에 빈 공간이 있었다. “저기에 벼를 하나씩 더 심으면 두 배 수확할 수 있지 않을까?” 언뜻 보면 합리적인 생각이었다.

그래서 중국 전역에서 심경밀식을 시행했다. 깊이 밭을 갈고 빽빽하게 벼를 심었다. 결과는 참혹했다. 벼들이 햇빛을 받기 위해 키 크기 경쟁을 시작했다. 옆의 벼가 그늘을 만들면 탄소 동화 작용을 하고 그 잘하고 알곡을 많이 맺을 수 있는 영양소를 만들 수 없기 때문이었다. 벼들은 키만 무성하게 자랐고 정작 알곡은 거의 맺히지 않았다. 에너지를 모두 키 자라는 데 써버린 것이다.

이 잘못된 농업 정책과 다른 여러 요인이 겹쳐 대약진 운동 기간 중국인 3천만에서 4천만 명이 아사했다. 농업 사회의 체감하는 생산 한계를 벗어나려는 비과학적 노력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 보여준 비극적 사례였다. 이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준다. 잘 살고 싶다는 욕망 자체는 자연스럽지만, 그 방법이 옳은 방향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옳은 방향으로 가면 산업 혁명으로 이어져 정말 잘 살게 되지만, 잘못된 방법으로 가면 최악의 결과를 맞을 수 있다.

산업혁명이 가져온 가속 사회의 혁명적 탄생

질소 비료의 등장으로 완전히 깨어진 맬서스 트랩

인류가 농업 사회의 근본적 한계를 극복한 결정적 순간이 있었다. 바로 질소 비료의 개발이었다. 이것이 맬서스 트랩을 완전히 깨뜨린 역사적 사건이었다. UN 통계에 따르면 현재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단백질의 40%가 질소 비료를 통해 생성되었다고 한다. 이는 질소 비료 없이는 현재 인류의 절반도 생존할 수 없다는 의미다.

이 혁명을 일으킨 주인공들이 바로 프리츠 하버와 칼 보슈였다. 스승과 제자인 이 두 사람은 모두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질소를 만드는 공정이 하버보슈법이라고 불리는 이유다. 질소 비료가 나오면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인구 증가 속도보다 식량 증산 속도가 더 빨라졌다. 수천 년간 인류를 괴롭혀온 맬서스의 저주가 마침내 풀린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살려면 식량만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다. 환경도 필요하고 위생도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농업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할 새로운 일이 필요했다. 농업 생산성이 높아져 농민이 줄어도 되니, 이제 “넌 농사 짓지 말고 좀 연구나 해 봐”, “넌 농사 짓지 말고 좀 다른 거나 해”라고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산업 혁명이 농업 혁명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제조업이라는 새로운 산업의 역사적 창조

산업 혁명의 진정한 의미는 단순히 기계가 발명된 것이 아니었다. 인류가 완전히 새로운 산업을 창조해낸 것이었다. 그전까지는 농업이 전체 산업이었다. 임업, 축산업도 모두 농업의 일환이었다. 그런데 산업 혁명을 통해 제조업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산업이 탄생했다. 그전에 있었던 수공업과는 차원이 다른, 기계와 석탄, 석유의 동력을 이용한 대량 생산 시스템이었다.

영국의 산업 혁명은 제임스 와트가 “내가 산업 혁명을 하겠어”라고 계획한 것이 아니었다. 현장에서 일어난 트라이 앤 에러, 그러니까 시행착오를 통해 발전된 것이었다. 와트는 기존의 뉴커먼 대기압 증기기관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었다. 그의 손재주와 맥가이버 같은 능력이 우연과 만나 일어난 결과였다. 하지만 이 우연이 완전한 우연은 아니었다. 우연을 키워줄 수 있는 배경이 있었다.

영국에서 일어난 1차 산업 혁명이 시행착오를 통한 우연과 필연의 조합이었다면, 2차 산업 혁명은 체계적으로 준비된 것이었다. 미국과 독일에서 일어난 2차 산업 혁명은 과학 기술적 지식을 공학이라는 학문을 통해 현장에 체계적으로 투입한 결과였다. 인간이 먹고 사는 새로운 방법이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 것이다.

성장률과 성장량의 착시에 숨겨진 가속의 진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다. “선진국들은 경제성장률이 낮아져서 성장이 둔화되고 있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이는 성장률과 성장량을 혼동한 착시다. 국민소득 1달러인 나라가 100% 성장하면 1달러가 늘어난다. 100% 성장했지만 실제 늘어난 금액은 1달러뿐이다. 반면 국민소득 1만 달러인 나라가 10%만 성장해도 1천 달러가 늘어난다. 성장률은 낮지만 성장량은 훨씬 크다.

이는 2차 대전 후 미국과 유럽의 관계와 비슷하다. 전쟁 피해를 입지 않은 미국 경제는 압도적으로 앞서 있었다. 독일과 일본은 완전히 파괴되어 제로 상태에서 시작했다. 유럽 경제가 미국 경제의 10%에서 20%, 30%, 40%로 따라잡아 갔다. 비율로만 보면 미국이 상대적으로 쇠퇴한 것 같지만, 절대적 격차는 오히려 벌어졌다. 미국도 계속 성장했기 때문이다.

현재 선진국들은 여전히 가속하는 사회다. 다만 성장률이라는 착시 때문에 성장이 둔화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실제로는 경제 성장량이 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율은 줄어들었지만 양은 더 커졌다. 경제가 성장한다는 거 자체가 농업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었던 일이었다. 산업 사회에서는 보편타당하게 다 일어나는 일이고, 당연히 성장한다고 생각한다.

4차 산업혁명으로 향하는 더욱 빨라지는 변화의 물결

경제가 가속적으로 성장하는 이유는 새로운 기술 혁신이 계속해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기 때문이다. 흑백 텔레비전을 만들면 쌀 한 가마 값이었다. 컬러 텔레비전을 만들면 쌀 다섯 가마 값이 되었다. 디지털 TV를 만들면 열 배 값이 되었다. 이런 식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기술 발전의 속도 자체가 점점 빨라지고 있다.

과거에는 큰 변화가 200년에 한 번, 100년에 한 번 일어났다면, 이제는 30년, 20년, 5년 단위로 변화가 일어난다. 성장 속도가 빠르면 성장의 인터벌도 짧아질 수밖에 없다. 자본 축적의 양이 발전된 기술의 양과 비례한다. 과거에는 100만 원, 200만 원, 천만 원, 1억 원 이런 식으로 증가했다면, 지금은 10억, 천억, 조 단위로 올라간다. 축적된 자본의 양이 곧 발전된 기술의 지표이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인터넷 혁명, 모바일 혁명, 인공지능 혁명 등을 통해 변화의 속도가 더욱 빨라질 수밖에 없다. 기술 자체가 넓어져서 언제 무엇이 폭발할지 모르는 상황이다. 4차 산업 혁명을 통해 더 빨리 가속하는 사회가 오고 있다. 만약 새로운 기술 혁신이 없다면 언젠가는 가속이 멈추거나 정체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계속해서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가속은 계속될 것이다.

지정학적 저주와 한국사의 근본적 재해석

연한국의 저주가 만든 끝없는 침략의 지정학적 숙명

농업 사회에서 전쟁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필연이었다. 모든 나라가 인구 증가 속도가 식량 생산 속도보다 빨랐기 때문에 모든 나라가 식량 부족에 시달렸다. 식량을 더 생산하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나쁜 토지를 개간하거나 옆 나라의 좋은 땅을 빼앗거나. 나쁜 토지를 개간하는 것은 너무 힘들었다. 옆 나라의 좋은 땅을 빼앗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이것이 바로 이다. 가까운 나라를 공격한다는 뜻이다. 근을 성공시키려면 원교근공이라는 기본 원리를 따라야 했다. 적의 적을 동지로 만들어야 승리할 수 있었다. 옆 나라 반대편에서 그 나라와 적대관계에 있는 다른 나라와 연합해서 양쪽에서 공격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지정학적으로 극도로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이웃 나라가 일본과 중국 대륙의 통일 왕조뿐이었다.

일본은 섬나라이고 한국은 연한국이다. 연한국과 섬나라가 있으면 섬나라가 이유 없이 연한국을 침략하게 된다. 연한국이 힘이 있을 때 군대 구성을 보면 7080%가 육군이고 2030%가 해군이다. 반면 섬나라는 100%가 해군이다. 항상 섬나라의 해군이 연한국의 해군보다 강하다. 그래서 섬나라가 쳐들어와서 조금 싸우다가 안 되면 돌아간다. 또 싸우다가 안 되면 돌아간다. 하지만 연한국은 힘이 있을 때도 섬나라를 건드릴 수 없다. 해군이 약하기 때문이다.

섬나라와 내륙국 사이에서 겪은 전략적 불리함의 현실

이런 지정학적 패턴은 한국과 일본만의 특수한 상황이 아니었다. 유럽의 영국과 프랑스 관계도 똑같았다. 프랑스는 국토가 영국의 두 배 이상이고 인구는 세 배나 된다. 국토도 비옥하고 평원이 발달했다. 그런데 100년 전쟁을 비롯해 영국과 프랑스가 벌인 16번의 전쟁 중 대부분이 프랑스 영토에서 일어났다. 이는 영국이 프랑스를 침략했다는 뜻이다.

우리는 일본보다 국토가 훨씬 작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은 12만~15만 명 정도였는데, 당시 기록에 따르면 우리나라 군대는 48만 명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대부분 북쪽에서 여진족을 막기 위해 배치되어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쟁 전에 밀정을 보내 조사한 결과 “조선은 이상한 나라입니다. 군대가 보이지 않습니다”라는 보고가 올라왔다.

조선의 국방 전략은 재승방략이라는 독특한 시스템이었다. 평상시에는 예비군 제도로 운영하고, 비상시에 서울에서 잘 훈련된 지휘관을 급파해서 현지 예비군을 지휘하는 방식이었다. 평소에 군대를 많이 키우면 돈도 많이 들고 사회적인 문제도 많이 일으킨다. 그래서 평소에는 농사, 생업에 종사하고 봉화가 올라가면 현지로 급파된 지휘관이 향토 예비군을 모아서 여진족을 막는 것이었다. 북쪽 여진족 상대로는 잘 작동했지만 남쪽 일본군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고구려부터 고려까지 동북아 최강국과 맞선 결승전의 역사

우리가 침략을 많이 받았다고 해서 약소민족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인식이다. 동북아시아의 전쟁사를 축구 토너먼트에 비유하면 우리 민족은 항상 결승까지 가는 민족이다. 이기기도 했고 지기도 했지만 결승까지 가는 민족이다. 고조선은 한무제와 싸워서 처음에는 이겼다. 한무제가 대장군의 목을 치고 후퇴할 정도였다. 나중에 고조선이 네 개로 분열되면서 넘어갔지만, 초기에는 당당히 맞섰다.

고구려는 수나라의 113만 대군을 완전히 박살냈다. 인류 역사상 단일 전투에서 가장 큰 규모의 군대를 물리친 것이다. 수나라가 그 후 망한 것도 이 전쟁의 여파였다. 당나라 당태종 때는 중국이 아주 발전하고 강했지만, 당태종이 연개소문과 양만춘에게 지고 돌아갔다. 당태종은 유언으로 “다시는 요동을 도모하지 마라. 고구려를 치면 나라가 망한다”고 할 정도였다.

고려는 칭기즈칸의 몽골 제국과 30년간 항몽 전쟁을 했다. 유럽 역사학자들에게 이 얘기를 하면 “발음이 나빠서 3년을 30년처럼 들린다”고 할 정도다. 3년을 견딘 나라도 없는데 30년을 버텼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려는 몽골 제국에서 불계토풍이라는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너희는 우리 제후이지만 너희 안에서는 황제를 칭해도 된다”는 것이었다. 고려왕은 전하가 아니라 폐하라고 불렸다. 고려는 몽골 제국 안에서 황제국이었던 것이다.

중국이라는 허상이 완전히 왜곡한 우리 역사의 진실

우리 역사 교육에서 가장 큰 문제는 “중국”이라는 용어의 남용이다. 중국이 국호로 생긴 것은 신해혁명 이후 중화민국이 생기면서부터다. 그 전에 중국은 중원이라는 지역 개념이었지 국가 이름이 아니었다. 한나라는 한족의 나라였지만 당나라는 선비족의 나라였다. 수나라도 선비족, 몽골은 몽골족, 청나라는 만주족의 나라였다. 중국 역사상 한족의 나라는 진나라, 한나라, 송나라, 명나라 네 개뿐이었다.

그런데 진나라는 잠깐이었고, 명나라는 국토가 청나라의 절반밖에 안 되었고, 송나라는 조공 바쳐서 연명하던 나라였다. 실제로 동북아에서 위세를 떨친 것은 원나라와 청나라 시대였다. 원나라는 몽골족이 세운 나라이고, 청나라는 만주족이 세운 나라다. 서양에서는 청나라를 팍스 만주리아나라고 부를 만큼 강성했다. 청나라가 아마 280년 정도 갔을 것이다.

우리가 모든 대륙 통일 왕조를 “중국”이라고 부르는 순간 중국의 동북공정을 대신해주는 것과 같다. “중원 대륙을 통일한 민족이 단 한 번이라도 점령했던 땅은 다 우리 땅이다”라는 것이 동북공정의 논리인데, 우리가 “중국”이라는 용어를 쓰면서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는 것이다. 유럽 역사를 이런 식으로 쓰면 로마가 중국이고, 나폴레옹의 프랑스가 중국이고, 히틀러의 독일이 중국이 된다. 이것은 역사가 아니다. 우리는 역사책에서 “중국”이라는 용어를 없애고 구체적인 왕조 이름을 써야 한다.

영국 산업혁명의 성공을 만든 우연과 필연의 조건들

인클로저 운동이 동시에 만든 자본 축적과 노동력 공급

영국에서 산업 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던 가장 기본적인 조건 중 하나가 바로 인클로저 운동이었다. 이는 공유지에 담장을 쳐서 사유지로 만드는 운동이었다. 과거에는 개인 소유지 사이사이에 황무지가 있었다. 이곳은 누구의 땅도 아닌 공유지였다. 사람들이 거기서 풀을 베어오고, 나무를 해오고, 소를 방목했다. 하지만 공유지는 아무도 관리하지 않아서 생산성이 낮았다.

이것이 바로 공유의 비극이다. 인클로저 운동을 통해 공유지에 담장을 치고 개인 소유지로 나누니까 생산성이 확실히 올라갔다. 내 땅이 되니까 열심히 개간하고 관리했기 때문이다. 특히 농사보다는 양치기가 훨씬 효율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로마의 카토가 “목축을 하세요”라고 했던 이유와 같았다. 양털 수요가 늘어나면서 대농장주들이 목축업으로 전환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그 땅에서 농사짓고 살던 농민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나가라, 여긴 내 땅이니까.” 농민들이 대거 쫓겨났다. 쫓겨난 농민들은 시골에 있으면 굶어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런던으로 몰려들어 도시 빈민이 되었다. 도시에서는 적어도 굶어 죽지는 않았다. 이렇게 인클로저 운동은 영국의 자본 형성과 노동력 공급이라는 산업 혁명의 두 가지 필수 조건을 동시에 만들어냈다.

장자 상속제가 낳은 기업가 정신과 해외 진출 의지

영국과 유럽 대륙의 결정적 차이 중 하나는 상속제도였다. 프랑크 왕국의 전통을 이어받은 프랑스는 균분 상속제였다. 샤를마뉴 대제가 자기 자식들한테 땅을 세 개로 나눠서 줬다. 거기서 생긴 게 프랑스하고 이탈리아, 독일이다. 그중에 프랑스가 제일 국토도 크고 비옥했다. 아들이 둘 있으면 반씩, 셋이 있으면 3분의 1씩 나누어 주었다. 윤리적으로 보면 더 공평해 보였다.

하지만 영국은 장자 상속제였다. 큰아들이 모든 것을 물려받고 차남, 삼남은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 프랑스는 나라도 크고 농토도 비옥한데 아들들에게 계속 쪼개어 주다 보니 전부 쪼만한 농장들만 남게 되었다. 반면 영국은 계속해서 장자에게 상속해주니까 큰 농장이 유지되었다. 농장이 커지니까 자본이 축적되고, 산업 혁명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그런데 영국의 차남, 삼남은 어떻게 해야 했을까? 귀족 가문의 자제인데 받은 재산이 하나도 없었다. 백작의 아들인데 내가 어디 가서 백작의 아들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방법은 두 가지뿐이었다. 성직자가 되어 존경을 받거나, 돈을 벌어서 해외에 나가 기업을 키우는 것이었다. 영국의 장자 상속제라는 불평등한 제도가 역설적으로 기업가 정신과 해외 진출 의지를 만들어냈다. 차남, 삼남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열심히 일할 수밖에 없었다.

하드파워에서 소프트파워로 변화한 제국주의의 진화

농업 사회의 제국주의와 산업 사회의 제국주의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로마나 몽골 같은 농업 사회 제국은 땅을 점령해야 했다. 점령해서 조공을 받고 세금을 걷어야 이익이 났다. 하지만 점령하면 할수록 전선이 길어지고 방어 비용이 늘어나서 일정 규모 이상 커지면 비용이 효과보다 커졌다. 이것이 바로 폴 케네디가 『강대국의 흥망』에서 주장한 오버스트레치다.

산업 강대국은 남의 땅을 뺏을 필요가 없었다. 그 나라에서 필요한 원료를 사고 우리 상품을 팔도록 허락해주면 점령하는 것 이상으로 돈을 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업 강대국은 “우리 통상할래?”라고 제안했다. 미국이 일본에 개항을 요구할 때도, 일본이 우리에게 강화도 조약을 제안할 때도, 영국이 인도에 진출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공정하게 거래를 하자, 무역을 하자”**가 기본 논리였다.

더 중요한 것은 강대국 상품이 후진국에 들어오면서 일어나는 일이었다. 우리나라도 일본에서 축음기가 들어오니까 만석꾼이 땅을 팔아서 축음기를 샀다는 얘기가 있다. 설탕 막대사탕을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빨고 다녔다. 선진국 상품을 쓰게 되면 국민들이 그 나라를 흠모하게 된다. “아, 저 나라 제품 좋아, 저 나라 따라 하고 싶어.” 이렇게 해서 군사력이나 경제력으로 압박하는 하드파워가 아니라, 좋은 상품과 문화로 자발적으로 따라오게 하는 소프트파워가 작동하게 되었다.

신기술이 창조하는 무한 시장 확장의 놀라운 가능성

그렇다면 산업 사회도 언젠가는 시장이 포화되어 더 이상 확장할 수 없지 않을까? 이미 전 세계가 다 개방되었는데 더 이상 확장할 시장이 있을까? 답은 신기술이 만드는 신제품에 있다. 흑백 텔레비전을 팔다가 시장이 포화되면 컬러 텔레비전을 판다. 컬러 텔레비전 시장이 포화되면 디지털 TV를 판다. 자전거를 팔다가 안 되면 오토바이를 팔고, 오토바이가 안 되면 자동차를, 자동차가 안 되면 아이폰을 판다.

신기술이 만들어내는 신제품이 시장을 무한히 확장해간다. 없던 시장을 새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스마트폰이 나오기 전에는 스마트폰 시장이 없었다. 하지만 스마트폰이 나오면서 거대한 새로운 시장이 창조되었다. 이것이 농업 사회와 산업 사회의 근본적 차이다. 농업 사회에서는 땅이라는 한정된 자원을 놓고 제로섬 게임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산업 사회에서는 기술 혁신을 통해 없던 시장을 계속 만들어낼 수 있다.

앞으로도 인공지능, 가상현실, 우주 산업 등 새로운 기술들이 새로운 시장을 계속 창조해갈 것이다. 그래서 산업 사회의 성장은 멈추지 않는다. 4차 산업 혁명을 통해 더욱 빠른 성장이 가능할 것이다. 지금 영국이 너무 강하고, 너무 멋있고, 너무 부유하고,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이 다 따라하기 시작했다. 세계어가 영어로 다 바뀌고, 세계 스포츠가 거의 영국 사람이 주도한 스포츠다. 축구도 영국, 골프도 스코틀랜드다. 이것이 바로 산업 혁명이 만들어낸 소프트파워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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