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9-08
목차
아편전쟁이 열어젖힌 문명의 대전환
세계 중심국가 청나라의 몰락, 서양 충격파의 시작
1840년, 인류 역사를 뒤바꾼 한 발의 포성이 울려 퍼졌다. 아편전쟁의 시작이었다. 그 이전까지 청나라는 의심할 여지없는 세계의 중심이었다. 차와 비단, 도자기로 대표되는 중국의 물건들은 전 세계가 탐내는 보물이었고, 영국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은 수입만 하고 수출할 것은 없었다. 서양 사람들이 중국을 “은의 블랙홀”이라고 부른 이유였다.
청나라 황제 앞에서 외국인들이 행하던 삼궤구고두례는 단순한 예의가 아니었다. 황제가 하늘에 제사 지낼 때나 하는 최고의 경의를 표하는 의식이었다. 조선의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청태종에게 굴복하며 행했던 그 굴욕적인 예법이, 사실은 모든 외국 사신들이 청나라 황제에게 바쳐야 하는 표준적인 의례였던 것이다. 그만큼 청나라의 위상은 절대적이었다.
하지만 영국은 무역 적자를 해결할 방법을 찾아냈다. 아편이었다. 인도에서 재배한 아편을 중국에 팔기 시작한 것이다. 악마적인 발상이었지만, 영국에게는 효과적인 해결책이었다. 청나라에서 아편 중독자가 급증하자 황제는 임칙을 파견해 아편을 몰수하고 불태웠다. 그리고 전쟁이 시작되었다.
양무운동의 시작, 기술만으로는 부족했던 근대화
아편전쟁의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세계 최강이라 여겨졌던 청나라가 조그만 섬나라 영국에게 처참하게 패배한 것이다. 영국군 사상자 500여 명에 청나라 사상자 2만여 명. 이는 단순한 승부를 넘어선 문명의 차이였다. 철선과 증기선으로 무장한 영국군함 앞에 목선과 범선으로 나선 청나라 수군의 모습은 시대착오적이었다.
청나라가 사용하던 화승총은 심지에 불을 붙여 발사하는 구식 무기였다. 반면 영국군이 사용한 플린트록 소총은 부싯돌을 때려 격발하는 자동화된 무기였다. 영국 군인들이 이 총을 “브라운 베스”라고 애칭으로 부를 정도로 신뢰했던 무기였다. 갈색 애인이라는 뜻이었다. 전장에서 총이야말로 목숨을 좌우하는 가장 소중한 동반자였기 때문이다.
패배의 충격에서 깨어난 청나라는 1861년 양무운동을 시작했다. 서양의 기술을 배우자는 운동이었다. 여전히 은의 블랙홀 역할을 할 정도로 부유했던 청나라는 서양 기술과 무기를 대량으로 도입했다. 서양 기술자들을 초빙하고, 자국 기술자들을 서양에 파견해 교육시켰다. 사람들은 청나라가 드디어 근대 강국으로 거듭났다고 생각했다.
동치중흥의 허상, 표면적 성공 뒤의 근본적 한계
동치제 시대, 사람들은 이 시기를 “동치중흥”이라고 불렀다. 중흥기라는 뜻이었다. 청나라가 열강 중 하나로 당당히 자리매김했다고 여겨졌다. 양무운동이 성공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표면적으로는 그럴듯해 보였다. 서양식 무기를 갖추고, 서양 기술을 도입하고, 서양 전문가들과 협력하는 모습은 분명 근대화의 징표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 성공은 피상적이었다. 양무운동의 근본적 한계는 기술만 도입하고 시스템은 그대로 둔 데 있었다. 군벌별로 각기 다른 나라에서 무기를 수입하다 보니, 총의 규격이 달라 총알도 호환되지 않는 상황이 벌어졌다. 프랑스제 총에는 독일제 총알이 맞지 않았고, 독일제 대포에는 영국제 포탄이 맞지 않았다. 통일된 체계 없이 기술만 들여온 결과였다.
7년 후인 1868년, 일본에서 메이지 유신이 일어났다. 과연 일본의 개혁이 청나라의 양무운동처럼 성공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반신반의했다. 청나라보다 훨씬 작고 가난한 나라에서 무엇을 해낼 수 있겠는가 싶었다. 하지만 16년 후인 1884년, 조선에서도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세 나라 모두 서양을 배우려는 움직임을 보인 것이다.
세 나라 세 길, 근대화의 갈래길에서
동도서기 중체서용 화혼양재, 온도 차이가 만든 운명의 갈래
비슷해 보이는 세 개의 슬로건 뒤에는 근본적으로 다른 철학이 숨어 있었다. 조선의 동도서기, 청나라의 중체서용, 일본의 화혼양재. 모두 전통과 근대를 결합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 같았지만, 그 온도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 달랐다.
조선의 동도서기에서 ‘도’는 더 이상 높을 수 없는 지고의 가치를 의미했다. 동양의 도 98%, 서양의 기 2% 정도의 비율로 받아들이겠다는 것이었다. 사실 조선 조정과 주류 유림에서는 동도서기라는 말조차 공식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이는 일부 실학자들의 주장일 뿐이었고, 주류는 위정척사를 고수했다. 주자학으로 서양의 사악함을 완전히 척결하겠다는 것이었다.
청나라의 중체서용은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었다. 청나라 조정이라는 몸체는 그대로 두고 서양의 기능만 받아들이겠다는 것이었다. 대략 기존 체제 70%, 서양 기술 30% 정도의 비율이었다. 정치 체제는 절대 바꿀 수 없다는 전제 하에서 기술적 개선만을 추구했다.
반면 일본의 화혼양재는 가장 과감했다. 일본의 혼만 빼고 나머지는 모두 바꾸겠다는 것이었다. 상투를 자르고, 옷을 갈아입고, 모든 것을 서양식으로 바꿨다. 심지어 영어를 공용어로 만들 계획까지 세웠을 정도였다. 실행에는 옮기지 못했지만, 그 의지만큼은 확고했다.
사농공상의 굴레, 기술자를 천시한 조선의 치명적 약점
조선이 근대화에 실패한 근본 원인 중 하나는 사농공상이라는 신분제에 있었다. 기술자와 상인을 천시하는 사회 구조에서는 아무리 서양 기술을 들여와도 발전시킬 수 없었다. 기술을 익히고 발전시킬 사람들을 사회적으로 무시하면서 어떻게 기술 발전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현대에도 이런 경향이 남아있다. 엔지니어링을 가장 부정적으로 표현하는 말이 “정치공학”이다. 정치 중에서도 가장 나쁜 것을 정치공학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용법이다. 원래 정치공작(Political Manipulation)이라고 해야 할 것을 공작과 공학을 혼동해서 만들어진 표현으로 보인다. 공학이 얼마나 천시받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미국에서는 STEM(Science, Technology, Engineering, Mathematics) 교육을 강조하면서 여기에 Art를 추가해 STEAM이라고 하자는 주장이 나왔다. 하지만 이를 잘못 이해한 일부에서는 과학, 기술, 공학, 수학은 필요 없고 예술만 있으면 된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스테이크는 없고 양념만 있으면 된다는 식의 사고다.
사무라이 사회의 역설, 칼의 품질이 기술 존중으로
일본이 근대화에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 중 하나는 사무라이 사회의 특성에 있었다. 칼로 먹고사는 사무라이에게 칼의 품질은 곧 생명이었다. 좋은 칼이 없으면 전장에서 칼이 부러져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기술자에 대한 존경심이 사회에 자연스럽게 배어 있었다.
임진왜란 때 일본이 조선의 도공들을 잡아간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조선에서는 천민 취급받던 도공들이 일본에서는 사무라이급 대우를 받았다. 그들이 만든 도자기는 유럽으로 수출되어 일본의 국부 창출에 크게 기여했다. 기술자를 우대하는 사회 분위기가 이미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일본의 주자학도 조선과는 달랐다. 조선에서는 주자가 쓴 글에 한 글자도 손대면 안 되는 절대불변의 진리로 받아들였다. 거기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수정을 가하려 하면 사문난적으로 몰려 파문당했다. 반면 일본에서는 주자학이 잘못되었다며 적극적으로 수정하고 일본식으로 개조했다. 이런 유연성이 근대화 과정에서 결정적 차이를 만들어냈다.
운명을 가른 한 발의 포성, 위기 인식의 차이
요시다 쇼인의 송하촌숙, 90명의 제자가 바꾼 일본의 운명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흑선을 이끌고 일본에 나타났다. 통상을 요구하는 미국에 일본은 거절했다. 그러자 페리 제독은 바다에서 시범 사격을 보여줬다. 직접 공격한 것은 아니었지만, 강력한 메시지였다. 다시 돌아올 때까지 개국하지 않으면 공격하겠다는 협박이었다.
이때 일본에서 올라온 보고서의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양이의 대포는 우리 일본의 대포보다 세 배 멀리 갑니다. 양이가 다시 와서 포격을 시작하면 우리 포탄은 단 한 발도 양이의 배에 미치지 못하고 우리는 앉은 자리에서 죽습니다.” 냉정하고 객관적인 현실 인식이었다.
이 위기 앞에서 요시다 쇼인이라는 지식인이 나섰다. 그는 자신이 직접 페리 제독의 배에 올라가 서양 기술을 배우려 했지만 쫓겨났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대신 제자를 가르치기로 했다. 송하촌숙이라는 소나무 빛 서당을 열고 90명의 제자를 가르쳤다. 판자집으로 된 다다미 여덟 장짜리 조그만 서당이었다.
요시다 쇼인의 교육 철학은 명확했다. 대양이 - 서양 오랑캐를 제압하는 올바른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소양이는 나쁜 방법, 즉 무철포로 달려들어 개죽음하는 것이었다. 총도 없이 총든 사람에게 달려드는 바보 천치를 무대포라고 불렀다. 대신 서양 기술을 배워서 서양을 이기자는 것이 대양이였다.
페리 제독의 시범사격, 절박함이 만든 대양이 정신
요시다 쇼인의 스승인 사쿠마 쇼잔이 처음 주창한 화혼양재 정신이 송하촌숙에서 체계화되었다. 일본의 혼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바꾸자는 것이었다. 이는 단순한 기술 도입이 아니라 근본적인 시스템 변혁을 의미했다. 요시다 쇼인은 29세에 요절했지만, 그의 제자들이 일본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막부군과 싸워 막부를 타도하고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킨 주역들이 바로 송하촌숙 출신이었다. 다카스케 신사쿠라는 장군이 대표적이었다. 요시다 쇼인의 제자였던 그는 막부군을 무찌르고 새로운 일본을 만들어냈다. 아베 신조 전 총리가 존경하는 인물로 요시다 쇼인을 꼽은 것도 이런 역사적 맥락 때문이었다.
송하촌숙에서 배출된 90명의 제자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일본의 근대화를 이끌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절박한 위기의식이었다. 지금 변하지 않으면 일본이 멸망한다는 절체절명의 인식이 이들을 움직였다. 페리 제독의 시범 사격이 보여준 압도적인 기술력 차이 앞에서, 이들은 근본적 변화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병인양요의 역설, 승리가 불러온 위정척사의 고착화
같은 시기 조선에서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졌다.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의 로즈 제독이 강화도에 침입했다. 이때 양헌수 장군이 뛰어난 전술로 프랑스군을 격퇴했다. 8도에서 호랑이 사냥꾼들을 모집해 매복 작전을 펼친 것이다. 프랑스 해병대원 7명을 사살하고 철수시킨 것은 분명한 승리였다.
하지만 이 승리가 오히려 독이 되었다. 양헌수 장군이 올린 장계에는 냉정한 현실 인식이 담겨 있었다. “우리 총은 100보를 나가는데 양이의 총은 500보를 나갑니다.” 일본과 똑같은 현실 인식이었다. 그런데 결과는 정반대였다.
흥선대원군은 척화비를 세우며 위정척사를 더욱 강화했다. “양이와 싸우지 않는 것은 화친하는 것이요, 양이와 화친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 어설픈 승리가 잘못된 자신감을 심어준 것이다. 신미양요 때는 미군 3명을 죽이고 350명이 죽는 참담한 결과를 낳았지만, 여전히 승리했다고 주장했다.
정치적으로는 승리로 포장할 수 있었지만, 현실은 달랐다. 결국 일본이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라고 군함을 보내자 어쩔 수 없이 굴복했다. 갑신정변을 통한 개혁 시도도 3일 천하로 끝났다. 개화파는 삼족이 멸해지고 개혁의 씨가 말라버렸다. 같은 위기를 당하고도 일본은 성공하는 길로, 조선은 실패하는 길로 갔다.
두 번째 기회, 4차 산업혁명의 교훈
스푸트니크 쇼크에서 실리콘밸리까지, 미국의 성공 공식
현대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산업혁명 사례는 미국의 실리콘밸리다. 그 시작은 1957년 스푸트니크 쇼크였다. 소련이 인공위성을 먼저 쏘아 올린 것이다. 세계 최고라고 자부하던 미국이 소련에게 뒤처졌다는 충격이었다. 이는 페리 제독의 흑선이나 아편전쟁 못지않은 문명사적 충격이었다.
케네디 대통령은 즉시 아폴로 계획을 발표했다. 10년 이내에 인간을 달에 보내겠다는 것이었다. 1969년 9년 만에 목표를 달성했다. 표면적으로는 달에 발자국을 남기고 온 것이 전부였다. 달에서 가져온 것도 없고, 실용적 도움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진짜 성과는 따로 있었다.
STEM 교육의 대대적 강화가 핵심이었다. Science, Technology, Engineering, Mathematics 교육에 엄청난 투자를 했다. 대학교수들이 조교들을 데리고 열심히 연구했고, 스탠포드 대학 같은 곳에서 훌륭한 연구자와 기술자가 대량으로 배출되었다. 이들이 모여서 실리콘밸리를 만들어낸 것이다.
휴렛패커드가 실리콘밸리 최초의 기업이었다. 휴렛과 패커드는 바로 이런 STEM 교육이 길러낸 인재들이었다. 실리콘밸리 발전에 필요한 기술의 85%가 공공 섹터에서 개발되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국가가 기반을 마련해주고, 민간이 응용과 사업화를 담당하는 구조였다.
정부 주도 산업혁명의 필연성, 자유시장 신화의 한계
1차 산업혁명은 시작은 민간이 했지만 완성은 정부가 했다. 특허법 같은 제도적 뒷받침이 있어야 기술 혁신이 지속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 모든 성공적인 산업혁명은 정부 주도로 시작해서 정부 주도로 완성된 것들뿐이었다. 자유시장에서 저절로 일어난 산업혁명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왜 그럴까? 이미 앞선 나라들이 엄청난 기술과 자본을 축적해놓은 상태에서, 제로베이스의 후발국이 자유시장에서 경쟁한다는 것은 중소기업이 삼성과 경쟁하겠다는 것과 같다. 처음에는 정부가 도와줘야 한다. 하지만 언제까지 도와줄 것인가의 문제가 남는다.
마치 학습 부진아를 지도하는 것과 같다. 내버려두면 점점 더 뒤처지지만, 계속 도와주면 독립적 능력이 생기지 않는다. 적절한 시점에 지원을 끊어야 한다. 국제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수준까지 끌어올린 다음, 치열한 경쟁 속에 내몰아야 한다.
우리나라 기업들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키스트 같은 국책연구기관이 외국 기술을 도입해 기업들에게 전수했다. 하지만 영원히 지원하지는 않았다. 적절한 시점에 지원을 끊고 기업들끼리 치열하게 경쟁하도록 했다. 그 결과 삼성이 소니를 앞지르는 기적이 일어났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 4차 산업혁명 앞의 한국
서양 사람들은 산업혁명을 “그레이트 다이버전스(Great Divergence)” 즉 대분기라고 부른다. 지금은 두 번째 대분기가 진행 중이다. 4차 산업혁명이 바로 그것이다. 정보와 인공지능을 활용한 새로운 문명으로의 전환기다. 첫 번째 기회를 놓쳤던 우리에게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과거의 관성에 젖어 있다. 의대 입시에 최고의 인재들이 몰리고, 공대는 미달이 되고, 반도체 특성화 과정에 들어갔다가 자퇴하는 학생들이 속출하고 있다. 과거 양헌수 장군이 서양의 총이 500보를 간다고 보고했지만 위정척사를 고수했던 것과 무엇이 다른가?
엔지니어링에 대한 천시 풍조는 여전하다. 중국에서는 휴머노이드 로봇이 춤추고 쇼를 하는 첨단 기술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미국과 중국이 주도하는 기술 패권 경쟁에서 우리의 설 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지금도 우리 사회의 엘리트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지금이 첫 단추를 다시 꿰는 결정적 순간이다. 과거에 위정척사를 선택해서 물려받은 불행이 지금까지 유전되고 있다. 북핵 위기, 분단의 고통, 동족이 동족을 핵무기로 위협하는 유일한 사례가 바로 우리의 현실이다. 이 모든 것이 150년 전 잘못된 선택의 결과다.
시작이 반이라고 했다. 인류 문명사에서 시작은 딱 두 번뿐이었다. 첫 번째 시작에서 실패했지만 한강의 기적으로 어느 정도 회복했다. 지금은 두 번째 시작이다. 이번에는 성공해야 한다. 우리 자손 만대의 행복이 지금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