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9-10
목차
뱅크런의 진실과 신용 팽창의 메커니즘
소문이 아닌 구조적 문제, 뱅크런의 진짜 원인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더글라스 다이아몬드와 필립 디브빅의 이론은 매력적이었다. 심지어 태양의 흑점 활동조차도 뱅크런을 일으킬 수 있다는 그들의 주장. 사람들의 심리만으로도 건전한 은행이 무너질 수 있다는 자기실현적 예언의 논리. 하지만 현실은 이론과 달랐다.
실제 역사를 들여다보면 집단적인 뱅크런은 진짜 구조적인 문제가 있어야만 발생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개별 은행 한두 군데가 소문으로 무너지는 경우는 있었지만, 여러 은행들이 동시에 뱅크런에 휩쓸린 경우는 예외 없이 신용 팽창을 통한 대출 부실화가 선행됐다. 한결같은 연구의 결론이었다.
왜 그럴까? 답은 간단하다. 모든 사람이 동시에 같은 소문을 믿고 행동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문제가 있다면? 그때는 다르다. 사람들의 직감이 작동하고, 위험 신호를 감지한 예금자들이 앞다퉈 은행으로 달려간다. 신용 팽창이라는 구조적 모순이 뱅크런이라는 현상으로 폭발하는 순간이다.
부분준비제도의 치명적 모순, 보관과 대출의 양립 불가능
17세기 런던의 금세공업자들이 시작한 이 제도는 태생적으로 모순을 안고 있었다. 고객들은 금을 ‘보관’해달라며 맡겼다. 언제든 찾아갈 수 있는, 만기가 없는 보관이었다. 하지만 금세공업자들은 이것을 ‘차입’으로 여겼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대출해주기 시작했다.
보관과 대차는 법적으로 완전히 다른 성격의 거래다. 보관은 맡긴 물건을 그대로 돌려받는 것이고, 대차는 빌린 것을 나중에 갚는 것이다. 하지만 은행들은 이 둘을 교묘하게 섞어버렸다. 부채인데 만기가 없는 부채라는, 존재론적으로 불가능한 것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는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사기의 시작이었다. 고객들이 한꺼번에 찾으러 오지 않을 것이라는 확률에 기대어, 없는 돈을 있는 것처럼 대출해주는 시스템. 10개만 보관하고 있으면서 20개의 보관증을 발행하는 마술같은 일이 가능했던 것은 오직 고객들의 무지와 신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 보관증의 가치는 반토막이 날 수밖에 없었다.
어빙 피셔의 비극, 버블 앞에서 무너진 대가의 이성
당대 최고의 경제학자 어빙 피셔. 그 맘씨 좋게 생긴 할아버지는 1920년대 미국 주가 버블이 생겼을 때 계속해서 경고했다. “이건 정상이 아니다!” 하지만 주가는 끝없이 올랐다. 몇 년 동안 계속해서.
부인마저 “제발 어디 가서 그런 소리 좀 하지 마라”고 애원할 정도였다. 주변에서는 욕을 먹고 거의 바보 취급을 당했다. 합리적 경제학자의 냉정한 분석이 광기 어린 시장 앞에서 무력해지는 순간이었다. 자산 가격 상승에 수반된 신용 팽창은 규모도 커지고 기간도 길어져서, 시장에 안 들어가고 버티기가 합리적인 사람에게도 정말 어려워진다.
그리고 비극이 일어났다. 이 할아버지가 안타깝게도 주식시장 폭락 직전에 주식을 샀다. 전 재산을 다 털어서. “주가가 더 이상 하락할 수 없는 고원의 지대에 도달했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전 재산을 잃었다. 가장 뛰어난 경제학자조차 버블의 마지막 순간에는 이성을 잃고 만 것이다. 신용 팽창의 마력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신용 팽창의 덫, 합리적 개인도 피할 수 없는 광기
“부동산이 오르면 미칠 것 같다”는 말에는 깊은 진실이 담겨있다. 비트코인이 오를 때도 똑같은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집값은 비트코인에 비하면 정말 “반의 반의 반도” 안 올랐는데도 사람들은 더 큰 고통을 느낀다. 자산 가격의 상승은 그 자체로 나쁘다.
왜 그럴까? 신용 팽창으로 인한 자산 가격 상승은 합리적 개인도 참여를 강요당하는 구조적 함정이기 때문이다. 참여하지 않으면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고, 참여하면 거품 붕괴의 위험에 노출된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상황이 오래 지속될수록 사람들의 “근로 의욕이나 도덕”이 지켜지기 어려워진다는 점이다.
정직하게 일해서 돈을 모으는 것보다 빚을 내서 자산을 사는 것이 더 빨리 부자가 되는 길이라면, 누가 성실하게 살려고 할까? 신용 팽창은 사회 전체의 도덕적 기반을 흔드는 독약이다. 개인의 합리성으로는 어쩔 수 없는, 시스템 차원의 문제인 것이다.
역사가 증명한 은행 위기의 필연성
17세기 런던 금세공업자들의 몰락과 최초의 근대적 뱅크런
1667년, 1670년. 런던에서 금세공업자들이 은행업에 뛰어든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하지만 벌써 다수의 금세공업자들이 파산했다. 현대 은행의 시작점에서 이미 위기가 시작된 것이다. 그들이 발행한 보관증은 마치 백화점 상품권과 같았다. 백화점이 망하면 상품권은 휴지조각이 되듯이.
금세공업자들이 망하면 보관증의 통화 기능은 완전히 사라졌다. 10개의 금만 보관하고 있으면서 20개의 보관증을 발행했으니, 평균적으로 보관증의 가치는 반토막이 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쉽게 잊었다. 30~40년이 지나면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새로운 세대가 똑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었다. 고통스러운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서 흐릿해지고, 탐욕은 다시 고개를 든다. 금세공업자들의 실패를 목격했던 세대가 사라지면, 새로운 금세공업자들이 등장해서 똑같은 방식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역사는 반복되었고, 은행 위기는 주기적으로 찾아왔다.
1720년 남해회사 버블, 뉴턴도 속아 넘어간 투기 광풍
1720년, 남해회사 버블이 터졌다. 이때 대부분의 은행이 파산했다. 은행이란 은행은 거의 다 무너졌다. 건전한 대출을 해주던 은행도 예외가 아니었다. 뱅크런의 속성상 선악을 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거대한 붕괴 속에서 큰 돈을 잃은 사람이 바로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아이작 뉴턴이었다.
뉴턴은 좌절했다. 그리고 유명한 말을 남겼다.
“천체의 움직임은 계산할 수 있지만, 인간의 광기는 도대체 계산할 수 없다.”
물리학의 아버지조차 인간의 탐욕과 공포가 만들어낸 시장의 움직임 앞에서는 무력했다. 합리적 계산으로는 예측할 수 없는 집단 심리의 폭발. 그것이 바로 버블과 그 붕괴의 본질이었다.
남해회사 버블 이후 은행들이 거의 다 사라지자, 50년 넘게 은행 수가 늘어나지 않았다. 사람들이 각인된 공포 때문에 은행을 멀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 기억은 점차 흐릿해졌다. 그리고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다시 매년마다 은행 위기가 끊임없이 일어나는 시대가 도래했다.
대공황 전야의 신호, 은행 수 폭증과 레버리지 배증의 재앙
미국에서 20세기 초반 일어난 극단적 위기, 대공황의 씨앗은 이미 그 전에 뿌려져 있었다. 첫 번째 신호는 은행 수의 엄청난 증가였다. 1880년부터 1920년 사이, 주법은행은 841개에서 22,000개로, 국법은행은 1,615개에서 8,000개로 폭증했다. 은행 수가 늘어나면 대출과 통화 공급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레버리지가 두 배로 늘어났다는 점이었다. 은행 수 증가와 레버리지 증가가 동시에 일어난 것이다. 예금 대비 대출 비율이 두 배가 되었다는 것은 거의 모든 은행들이 위험을 두 배로 늘렸다는 뜻이었다. 이는 필연적으로 신용 팽창을 가속화시켰다.
예외 없이 은행 위기는 신용 팽창 직후에 온다는 역사의 교훈이 다시 한 번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1930년부터 1943년까지 미국 전역에 걸쳐서 뱅크런이 일어났다. 개별 은행들은 “인출 중단”이라는 극단적 조치를 취했다. 그냥 “배째라”며 셔터를 내린 것이다. 10센트짜리 동전으로 천천히 나눠주면서 시간을 끄는 은행들도 있었다. 은행 직원들을 줄에 끼워 넣어서 줄을 더 길게 만들기도 했다.
루스벨트의 은행 휴일, 전국적 패닉을 멈춘 극단적 처방
은행 위기가 너무 오랫동안 지속되자 루스벨트 대통령은 극단적 결단을 내렸다. 1933년 3월 6일, 취임하자마자 전국의 모든 은행을 일주일간 문 닫게 했다. “은행 휴일”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했지만, 실제로는 전국적 은행 셧다운이었다.
이전까지는 뱅크런이 생기면 개별 은행이 인출 중단으로 버티거나, 주지사가 해당 주의 은행들을 닫는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안 되자 연방 정부가 나선 것이다. 전례 없는 극단적 처방이었지만, 효과는 있었다. 일단 패닉을 멈춘 것이다.
연방 정부는 모든 은행의 장부를 조사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건전한 은행부터 영업을 재개시켰다. 이것이 중요한 시그널이 되었다. “연방 정부가 사인을 준 은행이다. 그럼 굳이 돈을 찾으러 갈 필요 없지 않나?” 예금자들의 심리가 안정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먼지가 가라앉고 나니 참혹한 현실이 드러났다. 거의 1만 개 가까운 은행이 파산했다. 그만큼 신용 팽창이 심각했고, 은행 위기는 개별 현상이 아니라 집단적 현상임이 다시 한 번 증명되었다. 개별 은행이 개별적으로 신용 팽창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 전체가 집단적으로 팽창하고 집단적으로 붕괴하는 것이다.
잘못된 해결책, 안전망의 함정
1844년 뱅크 차터 액트의 치명적 실수, 예금을 놓친 통화학파
빅토리아 여왕 시대, 로버트 필 총리가 주도한 뱅크 차터 액트는 야심찬 개혁이었다. 은행들이 더 이상 대출로 통화를 창출하지 못하게 하는 법이었다. 다른 모든 은행의 지폐 발행을 금지하고, 영란은행만 발행하되 100% 금을 보유하게 했다. 사실상 가짜 대출은 없애버리겠다는 의도였다.
통화학파와 은행학파 사이의 치열한 논쟁 끝에 통화학파가 승리했다. 부분준비제도가 모든 문제의 원흉이니 100% 준비제도로 가야 한다는 주장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이론적으로는 완벽해 보였다. 하지만 여기서 결정적인 실수를 했다.
지폐만 통화라고 생각하고, 예금은 통화라고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지폐 발행은 금지했지만, 예금 창조는 그대로 놔둔 것이다. 은행들은 금세 해결책을 찾았다. 대출을 해줄 때 지폐 대신 예금 장부에 기록해주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고객들은 수표를 사용해서 거래했다. 지금의 은행 시스템과 똑같은 방식이었다.
결과는 참혹했다. 100% 준비제도를 도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은행 위기는 계속 발생했다. 사람들은 “통화학파의 이론이 틀렸다”고 결론지었다. 실제로는 개혁이 불완전했을 뿐인데, 은행 제도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는 잘못된 인식이 퍼졌다.
중앙은행의 탄생, 은행을 구하기로 한 역사적 선택
뱅크 차터 액트의 실패 이후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은행을 고치려 하지 말고 은행을 구하자는 쪽으로 방향이 돌아선 것이다. 그래서 중앙은행의 최종 대부자 기능이 등장했다. 뱅크런이 벌어지면 중앙은행이 돈을 찍어서 은행에게 준다. 예금 인출에 대응하라고.
논리는 간단했다. 현금에 비해 예금을 10배로 늘려놓았는데, 예금자들이 인출하려 하면 줄 돈이 없다. 그때 중앙은행이 현금을 공급해주면 된다는 것이었다. 19세기 중반 영란은행에서 시작된 이 제도는 순식간에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영국이 대영제국 시절 세계 최강국이었기 때문이다. “영국이 중앙은행을 세워서 은행들을 구제해주더라. 이게 맞는 방향인가?” 하며 다른 나라들도 앞다퉈 따라했다. 마치 요즘 미국이 스테이블코인을 하니까 다들 따라가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었다.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대공황의 참상을 겪고 나니 시카고 대학교 교수들을 중심으로 “시카고 플랜”이 나왔다. 어빙 피셔도 『100% Money』라는 책을 써서 지지했다. 하지만 은행들의 강력한 반대로 무산되었다. 결국 영국처럼 중앙은행(연준)을 설립해서 은행을 구제하는 쪽으로 가게 되었다.
예금보험제도의 모럴 해저드, 보험 원리에 어긋난 제도
중앙은행의 최종 대부자 기능과 함께 도입된 것이 예금보험제도였다. 하지만 이 제도는 도입 전부터 문제가 많았다. 미국에서는 연방 차원의 예금보험제도 도입 법안이 150건 정도 상정되었지만 모두 폐기되었다. 이유는 명확했다. 모럴 해저드 때문이었다.
실제로 일부 주에서 먼저 도입해본 예금보험제도는 처참하게 실패했다. 예금보험에 가입한 은행들이 오히려 더 부실해졌다. 예금자들이 “어차피 정부가 보장해줄 테니까” 하며 부실한 은행에서도 예금을 빼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실이 더 심화된 상태에서 결국 파산하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더 큰 문제는 예금보험제도가 보험의 기본 원리에 어긋난다는 점이었다. 보험은 대수의 법칙에 기반한다. 보험 가입자가 여럿 있어야 하고, 개별 사건들이 서로 독립적이어야 한다. 하지만 은행 파산은 집단으로,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개별 사건이 아니다.
따라서 예금보험제도는 애초에 불가능한 제도였다. 진짜 위기가 오면 기금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 결국 정부가 나서서 해결해야 한다. 그렇다면 차라리 처음부터 정부 보증으로 하는 것이 낫다. 허울뿐인 보험 제도로 포장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금융 억압기의 역설, 40년간 은행 위기가 사라진 시대
안전망 도입과 함께 강력한 규제가 따라왔다. 모럴 해저드를 막기 위해서였다. 은행들은 요구불 예금에 금리를 일체 줄 수 없게 되었다. 예금 금리에도 상한이 설정되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부동산 대출이 전면 금지되었다.
1930년대 중반부터 1970년까지 40년간, 사람들은 집을 살 때 현금을 모아서 사야 했다. 주택담보대출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집값은 소득 수준에 맞춰서만 올랐다. 투기적 거품이 생길 수 없는 구조였다.
이 시기를 금융 억압기라고 부른다. 반대론자들은 “은행이 은행 역할을 안 하니까 위기가 없는 것뿐”이라고 비판했다. 마치 “화장실 문을 다 잠가놓으면 화장실이 깨끗한 건 당연하다”는 식의 논리였다. 하지만 경제성장률은 전혀 낮지 않았다. 생산적인 기업 대출은 여전히 이뤄졌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성과는 역사상 처음으로 은행 위기가 지구상에서 사라졌다는 점이었다. 40년간 단 한 번도 대규모 은행 위기가 발생하지 않았다. 금융이 실물경제를 지원하는 본연의 역할에 충실했던 시대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또 잊기 시작했다.
과잉 금융 시대의 도래와 그 결과
1970년대 규제 완화의 재앙, 봉인 해제된 신용 팽창의 괴물
1970년대 신자유주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프리드먼과 하이에크로 대표되는 자유시장 경제학자들의 주장이 힘을 얻었다. 정부 개입이 너무 심해서 비효율이 커졌다는 비판이었다. 효율성 측면에서는 맞는 말이었다. 정부가 자원을 배분하는 데 있어서 시장보다 효율적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여타 산업과 은행업을 똑같이 취급한 것이었다. 은행에는 안전망이 있다는 특수성을 놓친 것이다. 40년간 은행 위기가 없었으니 사람들이 또 까먹었다. “다른 산업도 규제 완화하는데 은행만 왜 이러고 있느냐”며 금융 규제를 대폭 완화했다.
그 순간 봉인되어 있던 신용 팽창의 괴물이 해방되었다. 안전망이 있는 상황에서 경쟁 제한 규제가 사라지니, 이전보다 신용 팽창이 더욱 심해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믿을 만한 뒷배가 생겼으니 더 과감하게 위험을 감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과는 즉시 나타났다. 1970년대에 9건, 1980년대와 1990년대에 각각 50건 이상씩 주요 국가에서 은행 위기가 발발했다. 40년간 잠잠했던 은행 위기가 폭발적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2008년 금융위기로 정점에 달했다.
본원통화의 바다, 2008년 금융위기가 만든 통화 대홍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일어난 일은 전례가 없는 규모였다. 안전망이 거의 모든 권역으로 확장되었다. 은행뿐만 아니라 보험회사, 증권회사, 심지어 일반 제조업체까지 구제되었다. GDP의 74%에 해당하는 천문학적 금액이 안전망으로 투입되었다.
본원통화 증가 추세를 보면 그 규모를 실감할 수 있다. 2007년부터 2014년까지 7년 동안 늘린 본원통화가 이전 50년간 늘어난 것의 4배였다. 말 그대로 본원통화의 바다였다. 중앙은행이 시장에서 직접 국채와 회사채를 사들였다. 개별 기업까지 지원하는 전례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때를 계기로 중앙은행의 역할이 “최종 대부자”에서 “최종 딜러”로 바뀌었다. 은행에게만 돈을 주고 은행이 알아서 처리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에서 직접 거래하는 딜러 역할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증권사처럼 직접 시장 조성자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구제 조치가 반복되면서 시장의 기본 원리가 훼손되었다. “파산 없는 자본주의는 지옥 없는 가톨릭과 같다”는 격언이 현실이 된 것이다. 파산 위험이 없다면 누구도 조심스럽게 경영하지 않는다. 도덕적 해이가 만성화된 것이다.
좀비 기업의 창궐, 상환 능력 없는 차입자들의 세상
과잉 금융의 가장 직접적인 결과는 좀비 기업의 증가였다. 안전망의 기대하에 은행들이 상환 능력이 없는 차입자에게도 계속 대출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주요국의 좀비 기업 비중은 1990년 4%에서 2007년 15%까지 늘어났다. 최근 한국은 상장기업의 40%가 이자보상비율 1 미만의 좀비 기업이다.
좀비 기업이란 이자도 제대로 못 갚는 회사들이다. 정상적인 시장경제라면 진작 퇴출되었어야 할 기업들이다. 하지만 은행들이 계속 돈을 빌려주니까 연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전 세계적 현상이다.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과잉 금융 체제의 필연적 결과다.
좀비 기업들이 시장에 남아있으면 건전한 기업들의 경쟁 환경이 왜곡된다. 정상적인 비용으로 경영하는 회사가 오히려 불리해진다. 시장의 자정 기능이 작동하지 않으면서 전체적인 생산성이 떨어진다. 경제 성장의 발목을 잡는 존재들이 오히려 보호받는 역설적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구조가 점점 고착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좀비 기업들이 많아질수록 은행들도 이들을 살려둘 수밖에 없다. 한꺼번에 정리하면 은행도 같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서로 기대어 있는 공생 관계가 형성된 것이다.
파산 없는 자본주의의 종말, 지옥 없는 종교의 공허함
과잉 금융이 심화되면서 실물경제와 금융의 괴리가 지속적으로 확대되었다. 전 세계 평균적으로 GDP 대비 민간 신용은 1980년대까지 100% 미만이었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계속 증가해서 지금은 훨씬 높은 수준에 있다. 과잉 금융이 시정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심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론적으로 금융의 적정 수준은 1이다. 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성장 기회가 모두 사업화될 수 있는 수준이다. 1보다 작으면 금융 부족으로 성장 기회가 유실된다. 하지만 1보다 크면 과잉 금융으로 오히려 부가치가 훼손된다. 부가치 창출과 무관한 자산 시장으로 돈이 흘러가기 때문이다.
실제 데이터를 보면 GDP 대비 대출 규모가 커질수록 주택 가격과 주가 상승률이 가팔라진다. 과잉 금융이 심해질수록 남는 돈이 모두 자산 시장으로 향한다는 뜻이다. 생산적 투자 대신 투기적 거래가 늘어나는 것이다.
결국 부분준비제도와 안전망의 결합이 과잉 부채와 과잉 금융의 핵심이다. 은행을 구하려는 선의의 노력들이 도리어 더 큰 문제를 만들어낸 것이다. 파산 위험이 사라지면서 자본주의의 핵심 동력인 창조적 파괴가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지옥이 없는 종교가 공허하듯, 파산이 없는 자본주의는 그 생명력을 잃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