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9-08

목차

시스템 리스크의 축적과 은행의 거대화

30년간 10%로 고정되었던 은행 집중도가 갑자기 폭발한 이유

“설마 저 은행이 망하겠어?”

이 한 마디가 현대 금융 시스템의 모든 문제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자본시장연구원의 신보상 박사가 『부채로 만든 세상』이라는 충격적인 제목의 책을 통해 고발한 현실은 생각보다 훨씬 심각했다.

미국 빅3 은행의 시장 점유율을 들여다보면 그 심각성이 한눈에 들어온다. 1930년부터 1989년까지 무려 60년간, 이들의 시장 점유율은 10%에서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자연의 균형점을 찾은 것처럼 안정적이었던 이 수치가 갑자기 요동치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다.

불과 10년 만에 두 배로 급등했다. 그것도 모자라 2007년에는 2000년 대비 또다시 두 배인 40%까지 치솟았다. 글로벌 금융기관들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1998년 8%였던 시장 점유율이 2008년에는 16%로 배증됐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신 박사의 설명은 의외로 생물학적 비유에서 시작됐다.

“생물학책을 읽다가 발견한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동물 개체들의 사이즈가 커지는 이유 중 하나가 주변 환경이 안정되면서부터라고 하더군요.”

주변 환경이 불안정하면 큰 덩치가 오히려 불리하다. 위험 상황에서 기민하게 대처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환경이 안전해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덩치가 클수록 경쟁에서 유리해진다.

은행들에게도 똑같은 논리가 적용됐다. 70년대, 80년대부터 시작된 금융 규제 완화와 각종 안전망 구축이 은행들에게는 ‘안전한 환경’을 제공한 셈이었다. 중앙은행의 최종대부자 기능, 예금보험제도 같은 안전망들이 하나둘 도입되면서 은행들은 파산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대마불사 지위를 얻기 위한 은행들의 무모한 경쟁

더 충격적인 사실은 이런 급격한 대형화가 진정한 효율성 추구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80년대와 90년대 초반까지의 연구들은 한결같이 같은 결론을 내렸다: 은행의 자산 규모가 100억 달러를 넘어서는 순간 규모의 경제는 사라진다.

100억 달러까지는 분명히 효율성이 높아졌다. 하지만 그 이후부터는 오히려 비효율이 시작됐다. 조직이 거대해지면서 계층이 늘어나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손실이 발생했다. 대기업 내부에서 혁신이 잘 일어나지 않는 것과 같은 현상이었다.

그런데 2000년대 들어 갑자기 상황이 바뀌었다. 새로운 연구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총자산 1000억 달러, 심지어 그보다 훨씬 큰 규모의 은행에서도 규모의 경제가 존재한다는 주장들이었다.

하지만 이런 연구들을 하나하나 까보기 시작한 후속 연구들의 결론은 달랐다. 이것은 규모의 경제 효과가 아니라 대형은행들이 누리는 ‘암묵적 보조금’ 때문이었다.

신용평가회사들의 평가 방식이 이를 명확히 보여줬다. 은행에 대해서는 두 가지 신용등급을 매겼다. 하나는 ‘스탠드얼론 레이팅’으로, 정부 지원 없이 은행 자체의 안전성을 평가한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가버먼트 서포트 레이팅’이었다.

“설마 정부가 저 은행을 파산시키겠어?”

바로 이 믿음이 반영된 등급이었다. 놀랍게도 가버먼트 서포트 레이팅은 스탠드얼론 레이팅보다 크게는 3단계까지 높았다. 신용등급에 따라 자금조달 비용이 달라지는 상황에서, 이런 차이는 곧 엄청난 암묵적 보조금을 의미했다.

실제로 계산해본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대형은행들에 대한 암묵적 보조금 규모가 매년 340억 달러 이상이었다. 이 보조금을 받기 위해 은행들은 무엇을 했을까?

M&A를 통해 총자산 1000억 달러를 넘기기 위해 최소 150억 달러 이상의 프리미엄을 지불했다. 경제학적으로 보면 말이 안 되는 거래였다. 하지만 시장의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주가도 올랐고 채권 가격도 올랐다. 대마불사 지위를 확보했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은행업의 핵심 경쟁력이 바뀐 순간이었다. 부동산에서 말하는 ‘로케이션, 로케이션, 로케이션’처럼, 은행에서는 ‘사이즈, 사이즈, 사이즈’가 되었다.

안전망이 만든 역설, 40배 레버리지의 충격

이렇게 급속한 덩치 키우기는 자기자본만으로는 불가능했다. 레버리지를 극한까지 끌어올려야 했다. 그 결과는 참담했다.

2007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 글로벌 대형은행들의 레버리지는 무려 40배에 달했다. 같은 시기 미국 일반 기업의 레버리지가 1.6배였던 것과 비교하면 얼마나 극단적인 수준이었는지 알 수 있다.

더 충격적인 사례들도 있었다. UBS나 도이치뱅크 같은 유럽 은행들은 60배, 80배까지 레버리지를 끌어올렸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60배 레버리지는 전체 자산 가치가 단 1.6%만 하락해도 자기자본이 완전히 사라진다는 뜻이었다.

“자기자본이 전체 자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굉장히 낮은 겁니다. 미미할 수준으로 낮은 거죠.”

이런 구조에서는 공격적인 자산 운용이 합리적 선택이 된다. 이익이 나면 레버리지 효과 때문에 주주들이 모든 수익을 가져간다. 반대로 손실이 나도 주주들이 잃을 것은 미미하다. 어차피 대부분이 부채로 조달된 자금이니까.

안전망이 더 큰 위험을 부추기는 역설적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금융의 동질화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바젤 규제가 만든 복사판 은행들의 등장

1980년대 후반, 글로벌 금융계에 새로운 규칙이 등장했다. 바젤 규제였다. 표면적으로는 은행들의 안전성을 높이기 위한 조치였지만, 그 이면에는 다른 의도가 숨어 있었다.

당시 일본 은행들이 극단적인 레버리지를 통해 세계 상위 은행 랭킹을 석권하고 있었다. 미국이 주도한 바젤 규제는 일종의 ‘은행판 플라자 합의’였다. 일본 은행들의 기세를 꺾기 위한 전략이었던 것이다.

바젤 규제의 핵심은 단순했다. 모든 은행이 동일한 최소 자기자본 비율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더해 자산별로 위험 가중치도 표준화했다. 국채는 0%, 주택담보대출은 50%, 일반 대출은 100%.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은행들의 자산 구성이 비슷비슷해져 버렸다. 과거에는 자신의 리스크 성향에 따라 자기자본을 더 쌓거나 덜 쌓았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규제 비율만 맞추면 됐으니까.

더 심각한 문제는 은행들이 규제에 맞춰 행동하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주택담보대출의 위험 가중치가 50%라는 것은 같은 자본으로 일반 대출의 두 배를 해줄 수 있다는 뜻이었다. 당연히 은행들은 주택담보대출로 몰려들었다.

뚜껑을 열어보니 은행들의 대차대조표 구성이 거의 똑같아져 버렸다.

글래스-스티걸법 폐지 후 찾아온 금융의 프랙탈 구조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 것은 1999년 글래스-스티걸법의 완전 폐지였다. 1935년 대공황의 교훈으로 만들어진 이 법은 은행업과 증권업을 엄격히 분리했었다.

분리의 배경에는 이해충돌 우려가 있었다. 은행이 어떤 기업에 대출을 해줬는데 그 기업이 돈을 못 갚게 되었을 때, 은행이 계열 증권사를 통해 그 기업의 주식을 일반인들에게 팔아 대출금을 회수하는 일들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1980년대 중반부터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자본시장이 대세 상승하면서 어마어마한 수익이 창출됐다. 예금과 대출로 소소하게 먹고살던 은행들에게는 탐나는 시장이었다.

폴 볼커 연준 의장은 끝까지 철벽 방어를 했다. “은행은 안전망을 제공받는데 그렇게 위험한 시장에 나가면 어떻게 하려는 거냐?”는 것이 그의 논리였다.

하지만 앨런 그린스펀이 연준 의장이 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그린스펀은 JP모건 고문 시절부터 은행들의 증권업 진출을 적극 지지해왔던 인물이었다. 그가 의장이 된 후 규제는 점진적으로 완화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학계에서도 엄청난 연구가 쏟아졌다. 과거 대공황 때 정말로 이해충돌이 있었는지 검증하는 연구들이었다. 결론은 의외였다. 실제로는 이해충돌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은행 계열 증권사를 통해 발행된 주식들의 품질이 더 우량했다. 은행이 이미 기업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갖고 있어서 더 나은 선별이 가능했다는 해석이 나왔다.

1999년 완전 폐지 이후 벌어진 일은 충격적이었다. 은행과 자본시장이 완전히 하나가 되어버렸다.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 글로벌 대형은행들의 대차대조표를 보면, 자산에서 대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20% 미만이었다. 부채에서 예금이 차지하는 비중도 20%가 안 됐다.

나머지 80%는 모두 자본시장 업무였다. 자본시장에서 단기로 자금을 조달해서 각종 유가증권을 사들여 트레이딩하는 것이 은행 업무의 핵심이 되어버린 것이다.

개별 은행을 열어보면 그 안에 금융 시스템 전체가 똑같이 복제되어 있는 ‘프랙탈’ 구조가 만들어졌다.

과거에는 은행에 문제가 생기면 기업들이 자본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했다. 자본시장에 문제가 생기면 은행에서 대출을 받았다. 상호 보완적 관계였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은행이 곧 시장이고, 시장이 곧 은행이었다. 다양성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은행 위기가 오면 시장 전체가 붕괴하고, 시장 위기가 오면 은행도 붕괴하는 구조가 되었다.

닌자 대출과 섀도우 뱅킹의 치명적 결합

2000년대 초 IT버블이 꺼진 후, 연준은 기준금리를 6%에서 1%대로 급격히 내렸다. 4년간 지속된 초저금리 정책이 무엇을 불러왔는지는 곧 명확해졌다.

은행들은 너도나도 대출에 나섰다. 우량 차주들은 금세 소진됐다. 하지만 안전망이 있는 상황에서 은행들의 행동은 과거와 달랐다. 처음부터 불량 차주를 타겟으로 삼기 시작한 것이다.

그 극단적 사례가 바로 ‘닌자(NINJA) 대출’이었다. No Income, No Job, No Asset. 소득도 직업도 자산도 없는 사람들에게까지 주택담보대출을 해준 것이다. 심지어 개 이름으로 대출이 나가는 경우까지 있었다.

문제는 미국 은행들에게는 레버리지 비율 규제가 있다는 점이었다. 15배 이상 못 늘리게 되어 있었다. 저금리 상황에서 불량 차주에게까지 막 뿌려야 하는데, 대차대조표는 꽉 찬 상황이었다.

해법은 은행 밖으로 끄집어내는 것이었다. 바로 섀도우 뱅킹이었다.

섀도우 뱅킹의 핵심은 은행의 비즈니스 모델을 그대로 복제하는 것이었다. 은행의 독특한 점은 장기 자산(대출)을 단기 조달(예금)로 운용한다는 것이다. 일반 기업들은 절대 이렇게 하지 않는다.

섀도우 뱅킹도 똑같은 구조를 만들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이라는 장기 자산을 ABCP(자산담보 단기증권)로 포장해서 판매하는 방식이었다. 신용평가회사들의 금융공학을 통해 불량한 서브프라임 모기지론들이 트리플A 등급의 우량 증권으로 탈바꿈했다.

2007년 기준으로 은행의 총부채는 14조 달러였다. 하지만 섀도우 뱅킹의 총부채는 22조 달러였다. 은행 바깥으로 끌어낸 규모가 본체를 넘어선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은행의 역할이었다. 섀도우 뱅킹 전체에 대한 은행의 **직간접 보증이 무려 70%**에 달했다. 투자자들은 생각했다. “은행이 보증을 서는데, 정부가 그 은행을 망하도록 놔두겠어?”

레버리지의 레버리지가 만들어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비율의 변화였다. 2000년부터 2009년까지 9년 동안 은행 총자산 대비 불량 모기지론 비율이 무려 16배나 높아졌다. 하지만 이런 변화는 대형은행에서만 나타났다. 중소형 은행에서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대형은행들이 자신들의 대마불사 지위를 확신하고 철저하게 이런 짓을 한 것이다.

중소형 은행들은 달랐다. 자신들이 파산하면 정부가 구제해주지 않을 가능성을 알고 있었다. 또한 서브프라임 모기지를 ABCP로 바꾸는 복잡한 과정에 필요한 각종 비히클들과 계열 증권사 데스크를 갖추지 못했다.

결국 정부가 나를 지켜줄 것이라는 확신이 없으면 할 수 없는 구조였던 것이다.

과잉금융이 실물경제에 미치는 악영향

정보 생산을 포기한 채 자산 시장으로만 흘러가는 돈

금융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무엇인가? 저축을 받아서 원금보다 더 큰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곳으로 자금을 흘려보내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정보 생산이 필수다. 차주를 선별하고, 대출 후에는 철저히 모니터링해야 한다.

적정한 수준의 금융 하에서는 금융이 늘어날수록 정보 생산 총량도 함께 늘어난다. 하지만 과잉금융은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인다.

오늘날 대출의 대부분은 부동산, 증권 등 자산 담보 대출이 주를 이룬다. 문제는 이런 대출이 실물경제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자산 시장으로 흘러간다는 점이다.

금융기관 입장에서는 정보를 생산할 게 없다. 그냥 시장 가격을 보고 “어, 비싸네”라고 판단한 다음 시가의 몇십 퍼센트에서 돈을 빌려주면 그만이다. 복잡한 심사나 모니터링이 필요 없다.

그 결과 실물경제에 기여하는 금융의 역할은 점점 축소되고 있다. 최근 실증 연구들을 보면 총 대출 규모가 GDP의 100%를 초과하면 오히려 경제 성장에 역행한다는 결과가 나오고 있다.

돈은 많아졌지만 그 돈이 생산적인 곳에 쓰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좀비 기업 40%가 만든 만성적 저성장의 덫

전 세계가 제로 성장으로 접어들고 있다. 일본화라고 부르는 현상이 전 지구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그 핵심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좀비 기업의 급증이다.

좀비 기업이란 이자조차 제대로 낼 수 없는 기업들을 말한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시장에서 퇴출되어야 할 기업들이다. 하지만 은행들이 안전망을 제공받는 상황에서는 다르다.

과거 같았으면 좀비 기업들에게 대출을 중단했을 텐데, 이제는 계속 대출을 해준다. 이것을 ‘에버그리닝(evergreening)‘이라고 한다. 이자낼 돈도 없는 기업에게 추가로 대출을 더 늘려줘서 그 돈으로 이자를 내게 만드는 것이다. 항상 잎이 푸르게 보이도록 만든다는 뜻이다.

전 세계적으로 좀비 기업이 2배 정도 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기업의 40% 정도가 좀비 기업이라는 충격적인 통계도 있다.

좀비 기업의 목적 함수는 부가가치 창출이 아니다. 애초에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없기 때문에 좀비 기업인 것이다. 좀비 기업의 유일한 목표는 생존이다.

생존이 목표인 기업은 이익을 따지지 않는다. 덤핑을 한다. 제품 시장에서 덤핑이 일어나니 정상 기업들도 제값을 받지 못한다. 동시에 생산요소 시장에서도 정상 기업과 좀비 기업이 경쟁을 해야 한다.

정상 기업들의 이윤 창출이 점점 어려워지는 것이다. 신규 고용과 신규 프로젝트 착수는 정상 기업의 몫인데, 정상 기업들이 이런 활동을 하기 어려워지니 경제 전체가 성장할 수 없다.

더 심각한 것은 새로운 기업의 진입 장벽이 높아진다는 점이다. 새로운 기술이나 아이디어가 있어도 수익이 나지 않는 시장에는 뛰어들고 싶지 않다. 경제는 갈수록 고령화되고 만성 저성장이 고착화된다.

이런 현상이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 더욱 심각하다.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가계 삶의 질 악화와 소비 변동성의 확대

개인 차원에서도 과잉 부채의 악영향은 곧바로 나타난다. 우리나라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 그 대표적 사례다.

부채가 너무 많다 보니 원리금 상환 부담이 어마어마하다. 특히 젊은 세대들의 경우 그 부담이 심각한 수준이다. 당연히 소비할 여력이 없어진다.

소비가 일어나지 않는데 경제가 성장할 리 없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부채가 많은 상황에서는 주로 자산을 담보로 해서 돈을 빌렸기 때문에, 자산 가격 변동에 따라 소비 패턴이 극단적으로 바뀐다.

자산 가격이 오르면 소비를 늘렸다가, 자산 가격이 내리면 거꾸로 소비를 확 줄인다. 소비 변동성이 널뛰듯 한다. 가계의 삶의 질이 안정될 수 없는 구조다.

이런 불안정성은 개별 가계뿐만 아니라 경제 전체의 예측 가능성을 떨어뜨린다. 정책 당국도, 기업들도 미래를 예측하기 어려워진다.

부채 의존 경제의 딜레마

자산 가격이 신이 된 세상, In Asset We Trust

과잉금융이 만들어낸 가장 근본적인 변화는 경제 운영 방식 자체가 바뀌었다는 점이다. 신 박사는 이를 ‘부채 의존 경제’라고 명명했다.

오늘날 대출의 대부분이 자산 담보 대출이다 보니, 자산 가격과 부채가 아주 긴밀하게 연동되어 있다. 지금의 자산 가격은 대부분 부채로 부양된 자산 가격이다.

부채는 고정된 금액이다. 그 상태에서 자산 가격이 조금이라도 빠지게 되면 모든 곳에서 디폴트가 생겨버린다. 사회 전체가 자산 가격을 유지하지 않으면 경제 시스템이 붕괴하는 구조가 되어버린 것이다.

더 나아가 자산 가격이 계속 올라줘야 모든 금융회사들이 계속 부채를 늘리면서 수익을 늘려갈 수 있다. 자산 가격이 더 오르지 않으면 부채 확대도 어려워진다.

모든 경제 주체가 자산 가격 상승을 위해 단일 대오를 형성하고 있다. 미국 달러 지폐에 새겨진 “In God We Trust” 대신, 현재는 **“In Asset We Trust”**인 셈이다.

자산 가격이 거의 신의 자리에 앉았다. 모든 사람들이 자산 가격을 중심으로 행동하고, 말하고, 판단한다.

부동산 가격을 떨어뜨릴 수 없는 시스템의 모순

이런 시스템에서는 부동산 가격을 떨어뜨릴 수가 없다. 떨어지면 정말 전체가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의 버블은 원하지 않겠지만, 모든 정부는 계속 올라가는 쪽을 타겟으로 놓을 수밖에 없다. 부채와 자산 가격이 항상 연동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접근법에는 근본적인 모순이 있다. 계속 올리는 쪽을 타겟으로 삼게 되면 결국 더 감당할 수 없는 수준까지 올라간다. 그럼 후유증이 훨씬 더 크다. 결국 더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래서 올바른 방향은 소득 증가에 따라 자연스럽게 부채 비율을 줄여가는 것이다. 급격하게 줄이는 것은 후유증이 있다. 하지만 지금보다 부채를 더 늘려서 자산 가격을 더 높이는 것은 곤란하다.

문제는 현실적으로 계속 올라갈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언젠가 치러야 할 대가, 그 끝은 어디인가

“언젠가는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신 박사의 답변은 흥미로웠다. 금융만의 관점에서는 계속 돈을 풀어서 인플레이션을 일으켜 부채 부담을 줄이는 방식으로 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이 택한 방식이 바로 그것이었다. 제로금리, 양적완화 등 융단폭격식 안전망을 제공했다. 코로나19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결과 과거와 달리 위기의 자정 작용이 거의 사라졌다. 그냥 계속 일방향이다. 위기가 오면 더 많은 돈으로 해결하는 패턴이 반복되고 있다.

“인류가 영원히 움직이는 연수 기관을 발견한 것은 아닌가?”라는 질문도 나올 법하다. 하지만 이런 방식의 지속 가능성에는 의문이 든다.

지금은 리스크를 뒤로 미루고 있는 상황이다. 리스크를 자꾸 뒤로 미루면서 에너지가 어마어마하게 축적되고 있다. 언젠가는 그 축적된 에너지가 폭발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물론 금융의 관점에서는 계속 돈을 풀면서 인플레이션으로 부채 부담을 줄여나가는 방식이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지속 가능한 해법일지는 의문이다.

우리는 지금 거대한 실험의 한복판에 있다. 인류 역사상 경험해보지 못한 수준의 부채 의존 경제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 실험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지금의 시스템이 지속 가능하려면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부채로 만든 세상의 미래는 여전히 안개 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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