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9-08
목차
한 아버지의 시계 비유가 바꾼 인생 궤적
역사 소설 소년이 만난 시계 태엽의 철학
중고등학교 시절 김태유 교수의 방은 역사 소설로 가득했다. 삼국지와 수호지를 읽으며 영웅들의 이야기에 빠져들고, 프루타르크 영웅전과 사마천의 사기를 탐독하며 과거 위인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이 그의 일상이었다. 어린 김태유에게는 역사학과 진학이 당연한 수순처럼 보였다.
“제가 읽은 역사 속에 있는 그 훌륭한 분들을 내가 따라할 수 있으면 나도 얼마나 좋고 사회에도 얼마나 많이 기여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으로 가득했던 그에게, 아버지는 전혀 다른 방향을 제시했다. 공과대학 진학을 권하는 아버지와 역사학과를 고집하는 아들 사이에 벌어진 그날 저녁의 대화는 한 인간의 인생 궤적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지금 몇 시냐?”라는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8시입니다”라고 답한 아들. 그러자 아버지는 더욱 예상치 못한 질문을 던졌다. “너는 8시인 줄 어떻게 아냐?” 시계를 보면 아는 것 아니냐는 당연한 대답에, 아버지는 깊은 철학이 담긴 비유를 꺼내들었다.
“그 시계가 바늘이 여덟을 가리키지 않느냐? 아니, 너 시계 바늘이 시간을 알려 준다고 생각하냐? 그건 눈에 보이는 거일 따름이야. 진짜 너한테 시간을 알려 주는 것은 그 뒤에 있는 태엽이 그 톱니바퀴를 24시간 쉬지 않고 째깍 돌려서 그 중요한 시간을 너한테 알려 주는 거야.”
이 한 마디는 어린 김태유의 세계관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았다. 아버지의 다음 질문은 더욱 결정적이었다. “너는 네가 읽은 역사라는 것은 시계 바늘 같은 건데, 너 시계 바늘 같은 사람이 되고 싶으냐, 아니면 시계 태엽 같은 사람이 되고 싶으냐?”
석유 위기가 열어준 새로운 학문의 길
공과대학에 진학했지만 여전히 학업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하던 김태유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찾아왔다. 1차, 2차 오일쇼크가 한국 사회를 강타한 것이다. 그 심각성은 IMF 외환위기보다도 훨씬 더 절박했다. 테헤란로 거리에는 차가 거의 보이지 않았고, 경찰들이 돌아다니며 불 켜진 집에 소등을 시켰다. 학교는 수업을 단축하고 공장은 조업을 단축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김태유는 자신만의 사명을 발견했다. “내가 그래도 세상에 태어나서 뭔가 보람이 있는 일을 해야 될 텐데, 석유 위기를 좀 해결하는 공부를 하면 어떨까?” 이는 단순한 학문적 호기심이 아닌, 조국의 위기를 해결하고자 하는 절절한 의지였다.
당시 한국의 국민소득은 천 달러에 불과했고 미국은 만 달러였다. 인구밀도는 세계적으로 높았지만 석유는 한 방울도 나지 않았다. 이런 절박한 현실을 담아 김태유는 미국과 영국의 108개 대학에 편지를 썼다. “우리나라는 국민 소득이 천 불쯤 되고, 인구 밀도는 세계적으로 높고, 석유 한 방울도 나지 않는데, 내가 석유 위기를 해결하는 공부를 하고 싶다. 우리나라가 너무 힘들다.”
대부분의 답장은 “쏘리”로 시작해서 “굿럭”으로 끝나는 세 줄짜리였다. 하지만 콜로라도 스쿨 오브 마인즈에서 온 답장은 달랐다. 이것이 그의 인생을 또 한 번 바꿔놓는 계기가 되었다.
공학과 경제학의 만남에서 탄생한 독창적 시각
콜로라도에서 자원 관련 공부를 시작한 김태유는 곧 딜레마에 빠졌다. 석유 한 방울 안 나는 나라에서 석유 공학을 열심히 공부해서 에너지 위기를 해결할 수 있겠는가? 이 근본적인 의문은 그를 공학에서 경제학으로 방향을 틀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 전환은 단순한 진로 변경이 아니었다. 영국의 석탄을 공부하다 보니 그것이 곧 영국의 산업혁명 연구였고, 미국의 석유를 연구하다 보니 그것이 미국의 2차 산업혁명 공부였다. 에너지 공부가 자연스럽게 문명사 연구로 이어진 것이다.
처음에는 이런 진로 변경을 후회하기도 했다. 다른 경제학도들이 세 과목을 수강할 때 자신은 여섯 과목을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내가 공대 진학한 게 낭비였나?”라는 자책도 따랐다. 하지만 훗날 국가 발전 원리를 연구하면서 깨달았다. 경제학자들은 과학기술과 대자연의 법칙을 모르더라는 것을.
“대자연의 섭리 속에, 자연의 법칙 속에 인간 사회의 법칙이 있기 때문에, 인간 사회의 법칙을 공부할 때 대자연의 과학기술을 안다는 사실이 나한테 얼마나 큰 도움이 되고 비교 우위가 되는지”를 절감한 순간, 그는 아버지에게 다시 한 번 감사하게 되었다.
석유 위기와 에너지가 열어준 문명사의 문
108개 대학에 보낸 절박한 편지의 결과
1970년대 석유파동이 한국을 강타했을 때, 그 충격은 상상을 초월했다. 현재의 젊은 세대들이 기억하는 IMF 외환위기보다도 훨씬 더 심각한 상황이었다. 테헤란로 거리는 마치 지금의 평양 거리처럼 한산했고, 에너지 절약을 위해 모든 것이 통제되었다. 이런 절망적 현실 앞에서 젊은 김태유는 자신의 인생을 조국의 에너지 문제 해결에 바치기로 결심했다.
그의 절박함은 108개 대학에 보낸 편지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당시 한국의 국민소득은 미국의 10분의 1에 불과했고, 좁은 땅에 많은 인구가 몰려 살면서도 에너지 자원은 전무한 상황이었다. 이런 현실을 있는 그대로 적어 보낸 편지의 대부분은 형식적인 거절 답장을 받았다.
하지만 콜로라도 스쿨 오브 마인즈의 반응은 달랐다. 이 학교는 미국 광업 교육의 자존심이자 등록금도 가장 비싸고 입학하기도 가장 어려운 곳이었다. 한국의 절박한 현실을 이해한 이들의 손길이 김태유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서울대 공과대학의 전신이 광업전문학교와 공업전문학교의 합병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는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콜로라도에서 깨달은 자원과 혁명의 연결고리
콜로라도에서 자원 경제를 공부하던 김태유는 근본적인 딜레마에 직면했다. 석유 캐는 기술을 아무리 완벽하게 익혀도 한국 땅에는 석유가 나지 않는다는 냉혹한 현실이었다. 이때 그는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섰다. 같은 자원 경제 분야에서도 엔지니어링을 깊이 공부하는 전공과 경제학을 깊이 공부하는 전공이 있었다.
**“석유 캐는 법을 아무리 알아봐야 우리나라에 석유가 안 나오니까”**라는 현실적 판단으로 그는 경제학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 선택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탁월한 결정 중 하나가 되었다. 왜냐하면 이를 통해 그는 에너지와 문명의 연관성이라는 거대한 관점을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영국의 석탄 연구는 자연스럽게 영국 산업혁명 연구로 이어졌다. 석탄을 캐낼 때 필요한 인력과 광산에서 물을 빼는 데 쓰인 증기기관의 발달, 이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었다. 미국의 석유 연구 역시 마찬가지였다. 미국이 석유를 제일 처음 시추한 나라로서, 석유 연구는 곧 미국의 2차 산업혁명 연구였다.
영국의 석탄에서 미국의 석유까지 에너지 혁명사
김태유의 연구를 통해 드러난 것은 에너지원의 변화가 곧 문명의 변화라는 사실이었다. 1차 산업혁명을 “석탄, 야금, 직물 혁명”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석탄을 때서 금속으로 기계를 만들고, 그 기계로 면직물을 짜는 것이 1차 산업혁명의 핵심이었다.
이어지는 2차 산업혁명은 “전기, 화학, 강철 혁명”으로 불린다. 이때의 핵심 동력이 바로 석유였다. 석유가 제공하는 풍부하고 효율적인 에너지가 전기와 화학공업의 발달을 가능하게 했고, 이는 강철 산업의 비약적 발전으로 이어졌다.
김태유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미래의 에너지원을 연구했다. 전력과 원자력 같은 첨단 에너지를 공부하다 보니 자연히 4차 산업혁명을 연구하게 되었다. 에너지 경제학자로 시작한 그의 학문적 여정이 결국 산업혁명과 국가 발전 원리를 연구하는 문명사학자로 귀결된 것이다.
이런 학문적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교수 생활 전반부를 서울대 공과대학 자원공학과에서 에너지 경제학 교수로 보냈고, 후반부에는 산업공학과로 옮겨가서 산업혁명과 국가 발전 원리를 연구하게 되었다. 한 개인의 진로 변경이 결국 한국의 미래를 설계하는 거대한 학문적 토대가 된 셈이다.
청와대에서 꿈꾼 4차 산업혁명과 현실의 벽
과학기술 부총리 승격과 예산 통합의 대담한 시도
김태유가 청와대 정보과학기술보좌관으로 부임했을 때, 그의 가슴은 평생 축구를 하던 선수가 월드컵 출전 기회를 얻은 것 같은 설렘으로 가득했다. 경복궁역에서 내려 마을버스를 타고 청와대로 향하던 그 순간, 그는 자신이 평생 연구해온 4차 산업혁명 이론을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라고 확신했다.
당시에는 ‘4차 산업혁명’이라는 용어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김태유가 사용한 표현은 ‘과학기술 중심 사회’였다. 그는 과거 한강의 기적이 인류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산업혁명이었다고 판단하고, 그 성공 요인을 분석해서 앞으로 할 4차 산업혁명에 접목하려 했다.
첫 번째 시도는 과학기술부 장관을 과학기술 부총리로 승격시키는 것이었다. 이는 스티븐 코비의 ‘성공하는 사람의 일곱 가지 습관’을 패러디한 설득 논리였다. 세상에는 중요한 일과 급한 일이 있는데, 이를 같이 하면 급한 일을 먼저 해서 실패한다는 것이었다. 중요한 일을 먼저 하게 하려면 중요한 일을 하는 부서를 독립시켜야 한다는 논리였다.
과거 경제기획원과 재무부가 분리되어 있을 때 한국경제가 성공했듯이, 이제는 중요한 일을 하는 과학기술부와 급한 일을 하는 기획재정부로 나눠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모든 사람이 반대했지만, 대통령은 동의했다. 과학기술부 장관을 과학기술 부총리로 승격시키는 첫 번째 성공을 거둔 것이다.
이공계 박사 50명 특채가 일으킨 정부 내 대혼란
부처를 만들고 부총리를 만드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돈이 있어야 일을 할 수 있었다. 김태유의 두 번째 도전은 예산의 통합이었다. 그는 과학기술 예산은 20년, 30년 후의 일인데 예산실의 인문계 출신 사무관이 미래에 무슨 기술이 뜰지 어떻게 아느냐고 반박했다.
“그것을 통째로 넘겨 달라”는 김태유의 요구에 예산실은 발칵 뒤집혔다. **“이거는 대한민국 예산 행정의 근간을 흔드는 행위다”**라는 거센 반발이 일었다. 하지만 김태유는 굴복하지 않았다. “당신들이 20년 후에 뜰 기술이 뭔지 아냐? 모르죠.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갈지 아냐? 모르죠. 그러니까 그거는 과학기술자들한테 맡겨라”고 설득해서 결국 예산을 확보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사람이었다. 태권도와 총검술만 하던 사람에게 드론 조정을 시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당시 산업부의 주요 국장 11~12명 중에 이공계 출신이 한 명도 없는 상황에서, 김태유는 이공계 박사 50명을 특별 채용해서 전진 배치하는 파격적인 결정을 내렸다.
이 결정은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고시촌에서는 “우리는 고시 공부 몇 년째 하고 있는데 이상한 사람들 특채한다”며 데모가 일어났다. 행정자치부에서는 “대한민국 관료 제도의 근간을 흔드는 엄청난 사건”이라며 강력히 반발했다. 김태유는 돈을 가진 재경부와 조직을 장악한 행정안전부, 이 두 거대 부처의 공적 1호가 되었다.
가장 큰 적이 된 과학기술부와 기득권의 저항
가장 아이러니한 일이 벌어졌다. 김태유가 과학기술부를 부총리 부서로 승격시키고 엄청난 조직과 예산을 확보해주려 하는데, 정작 과학기술부가 이를 가장 극렬히 반대한 것이다. 김태유는 자신의 가장 강한 우군이 될 것으로 기대했던 과학기술부가 가장 큰 적군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과학기술부의 반대 이유는 명확했다. 첫째, 과기부가 앞으로 큰 일을 맡게 되면 기획재정부의 핵심 멤버들이 와서 요직을 다 차지하고 자신들은 물러나야 한다는 두려움이었다. 행정고시 성적이 좋은 사람들이 1지망으로 기획재정부를 가고, 이들이 다른 부처에 가면 요직을 장악하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다.
둘째, R&D 카르텔에 대한 기득권 유지였다. 과학기술부에서 국가 출연 연구소에 주는 엄청난 연구개발 예산을 자신들이 좌지우지하는 지위를 상실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였다. 김태유가 과기부를 경제기획처럼 기획부로 만들면 실무부의 역할이 위축되어 기존의 실권을 잃을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이 두 가지 요인이 상승작용을 하면서 과기부는 김태유의 개혁을 무산시키기 위한 전천후 노력을 다했다. 김태유에게 우호적인 내부 인사가 알려준 바에 따르면, 과기부의 전직, 현직 핵심 멤버들이 모여서 수없는 회의를 하며 대안을 준비했다고 한다. 그들의 목표는 오직 하나였다: 김태유의 개혁을 절대로 성공시켜서는 안 된다.
새벽 3시 깨달음과 20년 학문 완성의 다짐
청와대에서 나온 후 김태유는 깊은 좌절에 빠졌다. 처음에는 상대방에 대한 원망으로 시작되었다.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자식들, 분명히 되는 건데, 나는 평생에 연구한 건데, 그리고 이렇게만 하면 우리나라가 세계에 제일 좋아지는 선진국이 되는데”**라며 세상 사람들을 원망했다.
원망은 점차 분노로 변했고, 그 분노는 서서히 자신을 향했다. “너는 얼마나 멍청한 사람이고, 얼마나 무능한 사람이면 하늘이 이런 기회를 줬는데도 이걸 못 했냐?”는 자책이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3시, 잠에서 벌떡 깬 그의 머리에 한 구절이 떠올랐다.
율곡 이이가 정암 조광조에 대해 평가한 말이었다: “정암은 학문이 완성되기 전에 세상을 바꾸려고 정치에 나가서 실패했다.” 과거에는 이 평가가 건방지다고 생각했던 김태유였지만, 이제는 그 의미를 정확히 이해했다. “맞아, 그거야. 너 김태유, 학문도 완성되지 않으면서 뭐를 네가 하겠다고 그래? 네가 세상을 바꾼다고?”
이 깨달음은 그의 남은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안 되겠다. 이제부터 내 남은 인생은 절치부심해서 국가 발전 원리, 이거 완성하는데 다 보낸다.” 그날부터 김태유는 모든 저녁 자리와 인간관계를 끊고 도시락을 싸서 학교에 가서 홀로 공부하는 수도승 같은 삶을 시작했다.
친구들 사이에는 그가 미국으로 갔다거나, 사우디아라비아 총장으로 갔다거나, 몸이 아파서 기도원에 들어갔다는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그는 묵묵히 20년 이상을 국가 발전 원리 완성에 몰두했다. 그 결과 《Economic Growth》부터 《태극의 비밀》, 《한국의 시간》 등 여덟 권의 책을 썼고, 마침내 자신의 이론을 완성했다.
그는 《한국의 시간》 서문 마지막에 이렇게 썼다: “명검을 만들어서 이 세상을 평정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지만은, 그렇지 못하더라도 나는 명검을 만들어서 세상을 평정할 무사한테 이걸 맡기고 싶다.” 20년의 침묵과 연구 끝에, 그는 진정한 개혁의 무기를 완성한 것이다.
진정한 문명은 산업혁명에서 시작된다
농업사회 8천년은 문명이 아닌 과도기였다
일반적으로 문명이라고 하면 인간 사회가 물질적, 정신적으로 진보된 상태를 의미한다. 통상적인 정의에 따르면 농업혁명이 일어나서 국가 체제가 갖추어질 때가 문명 사회의 시작이고, 그 이전의 수렵채집 사회는 미개와 야만의 사회로 분류된다. 하지만 김태유는 이런 통념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그의 관점에서 농업혁명 이후의 농업 사회는 문명 사회가 아니다. 왜냐하면 농업 사회의 일반 서민 대중이 과거보다 더 잘 살아야 문명이라고 할 수 있는데, 농업 사회의 대중은 수렵 사회보다 훨씬 더 못 살았기 때문이다.
맬서스의 인구론이 이를 명확히 보여준다. 식량 생산은 산술급수적으로 늘어나는데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그 결과 모든 사람은 기아선상에서 겨우 생존하는 헐벗고 굶주린 상태에서 살게 된다. 어느 해 풍년이 들어 식량이 늘어나면 아이가 더 많이 태어나고, 결국 다시 기아선상으로 돌아가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농업 사회에서는 어느 누구도 열심히 해서 부자가 될 수 없다는 점이다. 농사를 지으면 한 시간 더 하면 한 가마 더 나오고, 두 시간 더 하면 한 말 더 나오고, 세 시간 더 하면 한 되 더 나온다. 수확은 체감하는데 노동은 가중되니 어떻게 부자가 될 수 있겠는가? 오히려 골병만 들어 빨리 죽을 뿐이었다.
수렵사회보다 못한 농업사회 사람들의 삶
농업 사회가 문명이 아니라는 김태유의 주장은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한다. 고고학적 발견에 따르면 농업 사회 사람들의 골밀도, 건강 상태, 심지어 키까지도 원시 수렵 사회보다 훨씬 열악했다.
원시 수렵 사회 인류의 키는 지역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170에서 180센티미터 사이였다. 당시 식단의 40~50%가 육식이었고 나머지도 수백 종의 야채를 산과 들에서 채취해 먹었기 때문에 풍부한 단백질과 균형 잡힌 영양을 섭취할 수 있었다.
반면 농업 사회로 들어오면서 육식은 10% 이하로 떨어지고, 먹는 곡물도 대량 생산이 가능한 몇 종류로 한정되어 완전한 영양 불균형이 발생했다. 다양성을 잃고 단조로운 식단으로 바뀌면서 인간의 체격과 건강은 현저히 악화되었다.
농업 사회에서 부자가 되는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권력을 가지고 남의 것을 빼앗는 것이었다. 농업 사회의 부자는 본질적으로 부도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부자의 돈을 훔치는 사람은 의적이 되었다. 로빈 후드, 양산박의 도적들, 홍길동까지 모두 의인으로 여겨진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경주 최부자 같은 착한 부자도 있었다고 반박할 수 있지만, 김태유는 단호하다. **“농사지어서는 부자가 될 수 없는 게 대자연의 섭리”**라는 것이다. 농업 사회의 부 축적은 고리대금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한 말 빌려주고 두 말 받는 식의 기하급수적 증가가 유일한 부의 원천이었다.
산업혁명이 가져온 인류 최초의 진정한 문명
김태유가 정의하는 진정한 문명은 산업혁명부터 시작된다. 산업혁명 이후 유아 사망률이 급격히 떨어졌다. 과거에는 아이가 태어나도 쉽게 죽어서 백일 전에는 그냥 버렸고, 돌 때까지는 이름도 짓지 않았다. 하지만 산업혁명 이후 유아 사망률이 거의 사라졌다.
평균 수명도 극적으로 늘어났다. 전 세계 동서양을 막론하고 농업 사회의 평균 수명은 30대 초반을 넘어간 지역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평균 수명이 80세까지 늘어나고 있다. 키도 많이 컸다. 영양 상태가 좋아지면서 원시 수렵 사회의 영양 상태를 다시 복구해가고 있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부를 축적하는 방식의 혁명적 전환이다. 산업 사회에서는 부자가 되려면 남을 착취할 필요가 없다.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생각해서 혼자 물건을 만들어 많이 팔면 부자가 될 수 있다.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지 가치를 착취하는 것이 아니다.
산업 사회에서는 일하면 일할수록 더 부자가 될 수 있다. 볼펜을 만든다면 한 시간 더 일하면 10개 더 만들고, 두 시간 더 일하면 20개 더 만들고, 세 시간 더 일하면 40개 이상 더 만들 수 있다. 규모의 경제와 기술의 경제 때문에 노력한 만큼, 아니 그보다 더 많은 수확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이 열어갈 문명사회의 완성
김태유는 농업 사회 8천 년을 문명이 아닌 과도기로 본다. 산업혁명에 의해서 진짜 문명 사회가 올 수 있는 준비 단계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4차 산업혁명에 의한 지식 산업 사회는 문명 사회의 극치를 보여줄 것이라고 확신한다.
농업 사회의 지배적 윤리는 근면, 청빈, 그리고 내세에 대한 희망이었다. “일해라, 근면해야 된다”고 강조하는 이유는 일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청빈하게 살아라”는 가르침은 어차피 가난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합리화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모든 종교와 도덕은 “죽어서 천당에 가라”고 했지, 살아서 천당에 갈 수 있다는 말은 없었다.
이는 살아서 천당에 갈 수 없는 세상이었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일하고 최소한으로 견디며 죽으면 천당에 간다는 것이 지배자들의 통치 이론이었고, 피지배자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생존 전략이었다.
하지만 산업혁명 이후의 세상은 다르다. 사람들이 실제로 더 잘 살 수 있게 되었고, 노력하면 더 나은 삶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4차 산업혁명은 이런 가능성을 극대화할 것이다. 인공지능과 로봇이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면서, 인간은 비로소 창조적이고 의미 있는 일에 집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김태유의 이론에 따르면, 이제야 비로소 인류는 진정한 문명 사회에 도달하게 된다. 물질적 풍요뿐만 아니라 정신적 충만함까지 모든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세상, 그것이 4차 산업혁명이 약속하는 미래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과거 농업 사회의 잘못된 관념들을 완전히 극복해야 한다. 근면과 청빈을 강요하는 대신, 창조와 향유를 추구하는 새로운 문명의 가치관이 필요한 시점이다.